아홉구비길

아홉구비길
3-1 국립수의과학검역원(구 혈청소)
3-2 빗살무늬 토기와 숫동(암남동 패총1)
3-2-1 일만 년 전의 가을날(암남동 패총 2)
3-3 동백꽃과 동박새
3-4 기다리는 마음
3-5 뉴질랜드 참전기념비
3-6 문바위골 <숭어들이>이야기
3-7 대마도를 보여드립니다.
3-8 장군산의 유래
3-9 송도의 야경


3-1 국립수의과학검역원(구 혈청소)

여러분, 송도에서 모지포로 넘어가는 이 고개의 왼쪽을 가로막은 긴 담장속에는 일제시대부터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된 비밀의 공간 혈청소가 들어서 해방 후 동물검역소로, 최근에는 국립수의과학검역원부산지원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십여 년 전 호주산 소를 수입하여 국내에서 한 달 이상 키워서 도살하면 국내산이라는 짝퉁 한우로 판매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지요? 그때 긴 소떼가 들어가던 곳이 바로 이 수의과학검역원입니다. 각종 동물의 생체와 가공품을 검역하여 전염병을 예방하고 유해동물의 반입을 방지하는 대단히 중요한 기관이죠. 1918년 창설된 이후 일제시대에는 주로 소와 말의 혈청에 대한 업무를 추진하여 흔히 혈청소로 불려왔습니다. 그래서 정원에는 검사용, 실험용으로 죽어간 수많은 소의 영혼을 위로하는 커다란 소위령비까지 있답니다.
 해방후인 1949년 부산가축검역소가 되었고 1979년 동물검역소 부산지소로 개칭되고 지금은 국립수의과학검역원부사지원으로 불리고 있지요.

 소재지인 서구에서 볼 때는 암남공원입구를 가로막기 때문에 한쪽 모서리가 철조망으로 차단되어 통행이 막힌 데다 모지포지역과 연계된 수산가공물류단지의 확충과 지역개발사업에 늘 장애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또 이 지역은 장군반도의 가장 잘록한 허리로서 옛 원시인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며 물고기와 조개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던 암남동패총자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됨에도 공식적인 학술조사를 결행, 일인들이 혈청소를 지음으로서 향토사와 고고학분야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한 점입니다.
 또 이 비밀스런 공간이 일제시대에는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만주의 731부대와 연계되었다는 민간의 소문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수의과학검역원의 이전은 지역사회의 해묵은 숙원이었지만 다행히 2010년 4월에 강서구에 이전키로 농림수산부장관과 부산광역시장간에 양해각서가 체결되었다니 참으로 반가운 소식입니다.
 이 검역원이 이전되면 측면이 차단되었던 암남공원도 사통팔달 편리하게 연결되고 국제수산물류무역단지의 관련기능도 확충될 것입니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미궁에 빠진 암남동패총을 발굴할 학술조사도 선행되어야겠지요. 아무튼 동물검역소의 이전은 정말 반갑고도 개운한 소식입니다.



3-2 빗살무늬 토기와 숫동(암남동 패총1)

여러분, 평소에 암남동 패총이란 말을 들어보았습니까? 아마도 오늘의 탐방에 나서기 전에는 대부분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암남동 패총은 구멍 뚫린 가리비 가면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도의 동삼동패총보다 약간 뒤진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동삼동 패총지역에 살던 집단의 식구가 점점 늘어나 그 구성원의 일부가 지금의 저 아래 지금 국립수의과학검역원자리인 모지포쪽으로 분가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공식적인 학술조사나 발굴이 없이, 또 동삼동패총의 그늘에 묻혀 거의 외부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셈이죠.
 그런데 일제시대에 일본인 도리이등이 이 패총을 발굴, 빗살무늬토기 몇 점과 전석(磚石)으로 불리는 숫돌1점, 마제돌도끼 2점, 조개팔찌 1점, 뼈로 만든 첨두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현제 그 정확한 지점과 연대초차 알 수 없으며
겨우 일본인 기요노가 소장했던 유물이 일본 천리대학 참고관에 보관되어 있고 그 초기의 탁본과 실측도가 우메하라 참고자료에 남아있어 이 유적의 성격을 짐작케 하고 있답니다.

 여러분, 왜 초기의 토기에는 빗살무늬들이 들어갔을까요? 그것은 최초에 토기를 구울 당시에는 흙반죽이 불에 굽히기 전에 뭉개지지 않도록 흙반죽으로 빚은 토기를 담아 불에 구웠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빗살모양의 무늬가 생겼기 때문이랍니다. 또 숫돌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숫돌이 지금의 정육점아저씨가 고기 자르는 칼을 쓱쓱 문질러 가는 그런 숫돌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먹에 쥐고 딱딱한 열매를 깨거나 나무를 자르는 돌칼이나 돌도끼를 가는 숫돌이니 숫돌역시 그냥 단단하고 펑퍼짐한 평범한 돌멩이였겠지요.
 그리고 돌도끼도 여러분이 어릴 때 본 박수동의 만화 고인돌의 주인공이 쓰는 자루 달린 도끼가 아닌 그냥 앞날이 좀 넙적한 길쭉한 돌로 보아야겠지요. 지금 여러분의 발밑에 채이는 평범한 돌멩이들이 바로 옛날의 돌도끼나 숫돌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3-2-1 일만 년 전의 가을날(암남동 패총 2)


고고학에서는 동삼동패총의 작은 집쯤으로 취급되는 암남동패총은 <한국의 고대어로>라는 패총전문의 책자를 보면 그 지층에서는 아주 드물게 동해안에서 잡히는 물과 뭍의 동물은 물론 남해안의 물고기와 조개붙이가 함께 발견된 매우 특이하고 중요한 패총이랍니다.
 사람들은 패총이라는 이름 때문에 패총을 조개의 무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패총은 조개무덤이 아니라 조개무지로 불리며 굴, 홍합, 소라등 조개류를 비롯하여 순록이나 곰, 심지어는 호랑이까지 고대동물의 뼈와 각종 씨앗과 꽃가루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있는, 주로 음식물 부산물이 퇴적된 일종의 쓰레기장입니다.

 당시의 음식물을 구하는 방법인 가장 기본적인 것이 수렵채취로, 그중 손쉽기가 움직이지 못하는 도토리나 버섯을 따고 새알을 줍는 방법이고 그 다음이 천천히 움직이는 조개류의 채취, 다음이 물고기나 작은 짐승을 잡는 일, 마지막이 잘못 하면 도로 목숨을 잃을 만큼 위험한 호랑이와 곰같은 맹수사냥이었겠지요.
 아까 말씀드린 데로 남해과 동해의 접점인 이 패총에는 위에 나오는 거의 모든 먹을거리의 흔적이 발견되는 데 출토량을 보면 가장 많은 순서가 물개의 일종인 강치가 주식이 되고 다음으로 순록, 굴을 비롯한 조개종류, 물고기, 곰등이 차례를 이었으며 도토리를 비롯한 식물의 씨앗들도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모두 먼 옛날 패총시대로 한번 돌아가 볼까요. 바야흐로 일 만 년 전의 어느 가을날 오후로 말입니다.
 영도섬이 마주 보이는 장군반도와 두도를 넘어서면 서쪽으로 트인 오목한 바닷가에 작은 움집하나가 있습니다. 움집안에는 수달피로 앞을 가린 어머니가 넓적한 돌 위에 마른 도토리를  펼쳐놓고 둥근 돌로 갈고 있습니다. 아홉 식구의 저녁거리입니다.
 머리가 헝클어져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다섯 아이가 발가벗은 채 바닥에 뒹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뒷산으로 순록을 잡으러 갔는지 물고기를 잡는 작살과 낚싯대는 움집바깥에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한참 후 아버지의 작살을 들고 나갔던 제일 큰 사내아이가 커다란 농어를 두 마리나 들고 자랑스럽게 나타납니다. 그 뒤쪽으로 처녀티가 완연한 큰 누나가 커다란 가리비와 대합조개를 순록가죽 치마폭에 가득히 담고 따라옵니다.

 해질 때쯤 아버지가 커다란 순록을 매고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돌칼로 순록의 가죽을 벗기는 아버지를 에워쌉니다. 모닥불을 피우고 통구이를 올려놓아 지글지글 고기가 익을 즈음, 휘익 바닷가에서 휘파람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다건너 동삼중리의 큰 아버지가 돌고래를 닮은 커다란 강치를 매고 찾아 온 것입니다. 사촌들도 다섯 명이나 왔습니다. 시끌벅적하게 저녁을 먹는 사이 환한 보름달이 떠올랐습니다.
  





3-3 동백꽃과 동박새

 여러분, 모짓개라고 불리던 여기, 모지포에서 송도해수욕장에 이르는 길을 암남공원로라고 합니다.
 혹시 이 길을 걸어보신 분이 계신다면 어느 지점에서나 사철 푸른 솔가지 사이로 솔잎보다 더 푸른 남항의 흰 파도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다 맑은 날이면 멀리 대마도가  보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옛날 송도해수욕장에서 모지포로 통하는 작은 오솔길이 1977년 국립수의과학원의 진입로로 확장되어 사용되다 1980년대 현재의 넓은 아스팔트길로 포장되자 낮에는 젊은이들의 아베크코스로 밤에는 부산 제1의 드라이브코스로 단숨에 알려지게 되었지요.

 이 암남공원로에는 김민부 시인과 손동인 시인의 시비 2기를 비롯하여 뉴질랜드참전기념비와 옛날 숭어잡이 망보던 바위가 있고 송도공원을 비롯한 전망 좋은 음식점이 즐비합니다. 그리고 건너 산기슭엔 동백나무가 길을 따라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동선과 탁 트인 전망을 가진 이 해안산책로의 가장 큰 명물은 아마도 이 도로를 따라 쭈욱 이어지는 한겨울에도 꽃피는 부산의 꽃 동백나무연도일 것입니다.

 다도해의 섬마다 붉디붉은 꽃을 피우는 동백꽃은 섬사람이나 어부 그리고 부산같은 따뜻한 남쪽 항구에 사는 모든 이에게 김소월 시인의 <영변약산 진달래>보다도 더 친숙한 가슴속의 꽃일 것입니다.
 1960년대 최대의 히트곡인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물론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에서도 꽃피는 동백섬으로 첫 구절에 등장하는 이 친숙한 꽃은 따뜻한 우리 부산시의 시화로 지정되어 <고결한 사랑, 겸손한 마음>이라는 꽃말처럼 인정 많은 우리 시민의 정서를 잘 나타내주기도 합니다.
 또 박목월의 시에서는 산다화라고 묘사되기도 한 이 우리나라 해안의 대표적인 꽃나무인 동백나무는 그 재질이 단단해 예로부터 얼레빗, 다식판, 장기쪽등 가구제조에 빼놓을 수 없는 재료였답니다.

  여러분 중에 동백꽃으로 특히 유명한 고창 선운사, <귀촉도>의 미당 서정주와 <태백산맥>의 조정래의 성장무대가 된 선운사 뒤 언덕의 그 붉디붉은 동백꽃을 본적이 있습니까?  정말 장관이지요. 그 선운사 동백숲에는 동백나무에만 깃들어 살며 동백꽃의 꿀과 작은 사과만한 동백나무열매를 먹고 사는 작고 귀여운 동박새가 있어 더 한층 운치가 있다지요..

 이곳 암남공원일대의 동백숲에도 1997년 학술조사에선 동박새가 서식한다고 보고되어 있지만 아직 동박새를 보았다는등의 동박새에 관한 예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숲의 규모가 동박새가 살기에는 좁은 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숲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싱싱함, 특히 저 푸른 바다의 전망은 선운사 동백숲에 무엇이 뒤지겠습니까? 어서 이 동백숲이 더 번지고 우거져 그 작고 아름다운 동박새를 어렵잖게 볼 수 있는 말이 오기를 다 같이 기대해보겠습니다.



3-4 기다리는 마음(김민부 시비)

여러분, 왼쪽의 커다란 시비를 보십시오. 부산의 대표적인 천재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민부 시인의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아담한 시비(詩碑)라기보다는 어쩐지 광개토대왕비처럼 거대하고 위풍당당한 기상이지요. 그것은 저 비수처럼 시퍼런 동쪽 바다에 넘어 말없음표처럼 옹기종기 도열한 오륙도(五六島)위에 기다리고 기다리다 해가 뜨기를, 그립고 그리운 달이 뜨기를, 마치 해와 달이 자신을 불러줄 단 한사람의 정인인 것처럼 애태우며 기다리는 거대한 그리움인지도 모릅니다. 또 그렇게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그리움을 담으려고 저렇게  우람한 자태로 선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요.

 아까 제가 김민부 시인을 천재시인으로 소개했는데 천재시인이란 일반적으로 시선으로 불리는 이백이나 영변약산의 진달래처럼 붉은 선혈로 죽어간 김소월처럼 시적 감성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경우를 말하지만 그런 시인이 요절함으로서 더한층 천재성과 신비감을 더한다고 할까요. 예를 들자면 김소월, 이상, 푸시킨, 라이나 마리아 릴케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김민부 시인 또한 아주 아까운 나이인 31세에 저 먼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김민부 시인은 여느 시인처럼 가난하거나 외로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부산 수정동 양과점집아들에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에 근무하는 능력있는 기자였으니 요즘으로 치면 엄친아내지 일등신랑감이라고 하겠지요.
 시인답게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한량이라 그가 사망한 1972년 10월 27일 새벽 3시경 그날도 얼근히 취해 다락방에서 촛불을 켜고 원고를 작성하다 불이 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튼 천재시인을 화마로 잃었다는 일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시인은 성남초등학교와 부산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부산은 물론 전국단위의 백일장이란 백일장은 모조리 제패할 정도였지만 장난이 너무 심해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을 정도로 개구쟁이이기도 했답니다. 부산문단을 대표하는 참으로 아까운 시인을 너무 일찍 잃었다고  70대 노시인들은 아직도 애석해하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두 연의 시는 다 읽어보았는지요? 천천히 한줄씩 읽어본다면 그 애절한 기다림과 그리움이 어느새 여러분의 가슴에 흥건히 고여 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저 시의 내용처럼 해를 기다리듯 달을 기다리는 그런 그리움이 있고, 그렇게 애달픈 사연과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까? 이 아름다운 풍광과 따스한 햇살에 젖은 이 순간 우리 모두 가슴 가득 그리움이 고인 시인이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3-5 뉴질랜드 참전기념비

여러분, 혹시 6.25때 우리나라에 군대를 파견한 혈맹이 된 참전16개국을 다 기억하는 분이 계십니까?
 또 그 16개국 중의 하나인 뉴질랜드가 먼 남반부에 위치한 줄은 잘 모르더라도 원주민인 마오리족의 전설에서 유래한 “비바람이 잠든 바다 잠잠해져오면...”으로 시작되는 <연가>라는 뉴질랜드의 민요는 한두 번 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바로 그 뉴질랜드군인이 처음 한국에 상륙한 지점이 송도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2001년 봄 주로 뉴질랜드 최대도시 오클랜드의 재향군인회의 한국전참전용사들이 참전기념비를 세우기로 하고 뉴질랜드영사와 서구청관계자들이 암남동 일대의 여러 지점을 답사하여 송도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 우뚝한 바위언덕에 뉴질랜드에서 실어온 거북이 모양의 거북바위라 불리는 기념석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서구청에서는 지리산에서 나는 좋은 기단석을 구해 오
고 진입로와 주변의 화단까지 말끔히 단장하여 기념식일정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기념식 당일 그만 포복절도할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당일 행사는 뉴질랜드참전용사는 물론 주한영사와 국방장관에다 부산시장과 서구청장이 참석하여 기념사를 하기로 식순이 짜였습니다. 이에 부산시의 국제협력담당사무관이 형장점검을 나와 직접 영어와 한국어 병기의 식순을 훑어보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기념석을 감싼 하얀 제막용 커버를 다시 맞추자는 것이었습니다. 기념석자체가 그리 크지 않아 양국의 내빈들이 끈을 잡고 제막을 하기엔 영 어울리지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기념석위에 제막커비를 덮을 높은 구조물을 세우고 커다란 제막커버와 끈을 달기로 하였습니다.
 시간이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는지라 급한 대로 커버의 길이만큼 붉은 나일론끈을 잘라서 국제시장포목점으로 직원을 출발시켰습니다.
 이어 버스로 뉴질랜드 재향군인들이 도착, 건장한 백인남자는 물론 뚱뚱한 마오리족 여성까지 송도항의 절경을 보고 원더풀을 연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새 커버는 오고 있는지 전화를 하니까 담당직원은 가고는 있는데 송도아랫길이 정체되어 꼼짝을 못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오토바이택배로 급히 보내라고 하는 사이 시장과 구청장, 그리고 뉴질랜드의 영사와 국방장관도 도착했습니다.
 우선 내빈들에게 주변경관을 안내하면서 교통경찰관에서 하얀 천을 실은 오토바이가 오면 빨리 안내하라고 시켰습니다.
 마침 시야에 오토바이 한대가 나타나 교통경찰이 순찰차로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택배기사는 교통단속을 하는 줄 알고 기념식장소를 지나 국립수의과학검역원쪽으로 쏜살처럼 내빼벼렸답니다. 휴대폰으로 연락해 동물검역소정문으로 되돌아온 기사에게 커버를 받아들고 3백 미터 가까운 오르막길을 직원3명이 릴레이 하듯 뛰었습니다. 그중의 2번 주자는 상당한 몸매의 여직원이었으니 참 볼만 한 풍경이었겠지요. 그렇게 행사는 잘 마졌습니다만 당시의 관계직원들은 지금도 생각만 하면 이마에서 진땀이 솟는다고 합니다.



3-6 문바위골 <숭어들이>이야기

여러분, 저 아래로 펼쳐진 V자형의 이 오목한 해역을 <문바위골>이라고 부르는데 몇 해 전까지 송도의 어부들이 <숭어들이>라고 부르는 숭어잡이를 하던 자리입니다.

 송도는 해수욕장개장이전에는 거의 민가가 없었고 개장이후  에도 해수욕장과 주변유원지를 찾는 방문객을 위한 서비스업만 발전하다 해방전후로 가덕도를 비롯한 남해의 어부들과 멀리 제주도의 해녀들이 유입되면서 비로소 체계화된 어업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가덕도출신 어부들이 가덕도 대항의 숭어들이를 문바위골에 들여오게 되었답니다. 그럼 지금부터 마지막 숭어들이의 어로장인 망수를 지낸 주중경선장(68)으로부터 구술된 숭어들이현장을 설명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옛날 숭어가 몰려오는 가을철이 되면 마을에서 가장 노련하고 눈이 밝은 어부가 저 왼손편의 시계탑이 있는 가장 높은 언덕에 원두막같이 생긴 망대를 짓고 그 위에서 숭어들이를 총지휘했다고 합니다. <숭어들이>란 지명이 아니고 육수자망이라는 여섯 척의 배가 통발처럼 생긴 그물망을 미리 바다에 깔아놓고 그 속으로 숭어떼가 몰려들 때 그물을 당겨서 잡는 어로기법을 말한답니다.
 그 여섯 척의 배는 망대의 바로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돌며 각각 안목선, 안잔등, 안귀잽이, 밭귀잽이, 밭잔등, 밭목선으로 불리는데 망대의 망수가 주로 영도다리 방향(아주 간혹 태종대방향)에서 숭어떼가 문바위골로 접근하면 “고기 온다!”라고 고함을 질러 선원들을 바짝 긴장시켰답니다. 그러다가 고기들이 미리 쳐둔 숭어들이로 완전히 들어오면 맨 앞쪽인 반목선과 안목선 중간에서 망대로 연결된 망줄을 벼락같이 당기어 입구를 봉쇄하고 숭어떼의 진행방향에 따라 “안목선 새기라! 받잔등 새기라!”라고 소리치면 각각의 배에 탄 어부들이 황급히 밧줄을 당겼답니다. 이렇게 한참동안이나 땀을 뻘뻘 흘리며 아주 재빠르게 밧줄을 당겨 마침내 거대한 숭어떼의 은빛 비늘이 그물에 가득하면 비로소 “어야디야, 어야디야” 흥겹게 소리치며 만선의 환호성을 질렀답니다..

 당시에는 어상자가 귀해 뱃전 가득히 쌓인 숭어들을 거북섬앞 어판장에 쌓으면 그게 몇 천 마린지 몇 만 마린지는 몰라도 커다란 두엄더미나 작은 집채만큼 쌓였다니까 듣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는 정말 푸짐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모처럼 숭어망대에 올라 저 푸른 문바위골에 여섯척의 선단을 거느린 어로장, 망수가 되어 우렁찬 목소리로 숭어들이를 지휘하는 호연지기를 한 번 펼쳐보시기 바랍니다.

 그 숭어들이가 오륙 년 전에 마지막 벌어진 후 지금은 어선도 감척되고 어부들도 나이가 들어 통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부분 70세에 가까운 어부들이 더 늙기 전에 언제 한번 숭어들이가 재현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3-7 대마도를 보여드립니다. 

 자, 여러분 저 건너 남쪽 바다를 보십시오. 남항 묘박지에 오순도순 떠 있는 무역선너머로 검은 띠 같은 것이 수평선에 가물가물 하는 것이 보입니까? 만약에 보셨다면 대단한 행운을 차지한 것입니다. 바로 대마도를 보신 것이니까요.

 여러분, 대마도는 비록 일본땅이지만 부산에서 휴대폰이 터질 정도로 가까운 곳입니다. 섬전체가 험준한 산으로 이루어져 늘 양식이 부족한 척박한 땅이죠. 그래서 흉년만 되면 왜구의 소굴이 되어 우리의 해안마을을 침탈한 것이 삼국사기에만 해도 수없이 등장하지요.
 또 임진왜란때는 대미도주 종의지란 자가 중 현소와 함께 침략의 염탐꾼과 앞잡이역할을 하였으니 우리에겐 가까운 이웃이면서도 친숙하거나 편안하기보다 눈위의 혹처럼 참으로 귀찮고 성가신 존재라 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대마도 관련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나무에 가려 훤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해수욕장 뒷편 천마산을 보십시오. 석성봉수대가 있는 정상에서 동쪽 영도섬을 향한 날카로운 바위봉우리하나가 보이시죠? 바로 천마바위입니다.
 아랫마을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천마산에는 풀밭이라는 뜻 의 초장(草場)동 마을이 있을 정도로 목초가 우거져 신라때부터 목마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목마장의 날렵한 천마가 저 천마바위에서 힘차게 발을 굴러 대마도로 건너갔다고 하며 그래서 천마바위에는 말발굽이 차고나간 움푹 파인 구덩이들이 여러 개 있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구덩이야 지각형성 때 생겼을 것이고 천마가 저 먼 곳까지 날아갈 수도 없겠지요. 그렇지만 재미있는 것은 저 천마산(天馬山)의 이름에 짝을 맞추듯 대마도는 그 천마산을 마주본다는 마주볼 대(對)자와 말마(馬)자의 대마도(對馬島)라는 점입니다. 참으로 묘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3-8 장군산의 유래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가 답사한 암남공원일대를 장군반도라 하고 왼쪽에 보이는 산을 장군산(將軍山)이라 부른답니다. 무슨 유래가 있을까요?

 민족최대의 국난인 1592년 임진왜란 때 일입니다. 삼천리강토가 송두리째 왜적에게 짓밟히고 오직 한산도의 이순신장군만이 왜적의 병참선인 남해를 차단하며 음력 7월 6일 그 유명한 한산대첩을 거두고 나서입니다. 전라경상연합수군이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부산, 김해, 명지, 낙동강등에 적선 500여척이 정박하여 연안을 약탈한다는 구원요청을 받고 지금의 영도앞바다와 다대포사이의 해역에서 왜선 수백 척을 격파한 <부산포대첩>때였습니다.
 당시 이순신장군의 수하에는 우부장 녹도(鹿島,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만호 정운(鄭運)장군이 좌부장 이억기 장군과 더불어 가장 충성스럽고 용맹한 장수였답니다. 그 날 선봉이 되어 맹활약을 펼치던 정운장군이 회군할 무렵 바로 저 앞바다에서 전사하였다하여 이 일대가 장군산과 장군반도라 불리었다고 전합니다만 정확한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답니다.

 여러분, 정운장군은 단순히 임진왜란때 전사한 수많은 장군중의 한 명이 아닙니다. 200년 이상 외침이 없이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던 시절이라 충무공 이순신, 동래부사 송상현과 흑의장군 정발, 다대포첨사 윤흥신같은 몇몇의 장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임지를 버리고 비겁하게 줄행랑을 놓는 판국에 충무공의 오른팔이 되어 그 많은 전투에 선봉장이 되어 치열하게 싸운 대단한 장수인 것입니다.
 그가 올린 대표적인 전과를 난중일기 1592년 7월 27일의 기록으로 살펴보면
 <아침 일찍 출발 영등(거제군 장목면)앞 바다에 이르니 적선이 율포에 있다고 한다. 복병선을 시켜 탐지케 했더니 적선이 우리가 먼저 온다는 것을 알고 남쪽 큰바다로 달아났다고 한다. 녹도만호 정운이 일시에 쫒아가서 적선 한 척을 온전히 사로잡아 왜적 머리 36개를 베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본관이 연일(延日)정씨인 장군은 나중에 병조참판 및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충장공이라는 시호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군산에서 전사한 정운장군의 사당은 왜 다대포에 있을까요? 전해 오는 말로는 장군이 다대포 앞바다를 지나다가 그곳 지명을 물어보다 몰운대(沒雲運)라는 말을 듣고는 죽다는 뜻의 <몰>자뒤에 오는 <운>자의 한글 운이 자기의 이름과 같아서 “아,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되겠구나.” 하고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다대포 몰운대에는 정운장군의 순의비와 사당이 있어 해마다 제향을 올린다고 합니다.(2010년은 제417회)

지금까지 우리가 그냥 푸르고 아름답게만 보아왔던 이 송도항이 바로 민족사의 현장이며 명장이 순국한 자리입니다. 아무리 외지거나 작은 땅이라 하여도 역사늘 피해가거나 피흘리지 않고 지켜낸 땅이 없다고 생각하니 새삼 옷깃을 여미게  하는군요.




3-9 송도의 야경

여러분, 이 곳은 송도일대에서 가장 야경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송도는 원래부터 백사장에서 보는 앞 바다, 볼레섬, 또 해안산책로나 암남공원로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송도만과 거북섬, 또 송림공원에서 바라보는 해안산책로일대, 거북섬에서 바라보는 백사장등 어디에서, 어느 뱡향을 바라보아도 모두 절경입니다.
 또 뜨거운 여름의 백사장도, 낙엽 지는 암남공원의 오솔길도, 아지랑이 아른대는 봄날의 바다도 좋지만 싸늘한 겨울바람에 점령당한 차디찬 겨울마저도 맑고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게다가 밤은 밤대로, 낮은 낮대로, 하늘이 맑으면 맑은 데로, 구름이 끼면 끼는 데로 일 년 365일 아름답지 않는 날이 없고 안개나 운무가 끼는 날의 회색 바닷가, 비 오는 날의 우수에 젖은 바닷가가 더욱 운치가 있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송도경치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높다란 언덕에서 바라보는 송도항구의 야경, 즉 백사장을 따라 길게 이어진 인근 상가의 붉고 푸른 네온사인이 물에 어려 꿈속처럼 출렁이는 모습입니다. 어둠속에 묻힌 부분은 배경과 상징이 되고 불빛에 어리는 부분은 영화나 꿈속처럼 아롱지기 때문입니다.
 그 절경의 백미보다 다 한층 기막힌 경치가 또 하나 있으니 바로 남해바다로 열린 묘박지의 야경입니다. 바람이 잔잔한 밤이면 오순도순 모여 앉은 배들이 꿈속에서 본 고향마을처럼 정겹다가도 풍랑이 심한 밤에는 배들이 모두 대피해버린 밤바다가 문득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적막속에 묻히기도 합니다. 게다다 오징어잡이철이 되면 수많은 어선의 집어등이 뿜어대는 휘황한 불빛이 마치 요술궁전처럼 황홀경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송도의 밤바다는 자세히 보면 2개의 V자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작은 V자는 현인광장을 기준으로 송림공원으로 이어지는 왼쪽과 새 어항입구로 이어지는 오른 쪽의 V자며
 두 번째 큰 V자는 멀리 자갈치를 기준으로 왼쪽의 V자와 송도로 이어지는 좌측의 V자가 빚어내는 환상적인 빛다발의 흔들림입니다. 여러분 다음에는 꼭 한번 야경도 구경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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