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속의 길

추억속의 길

4-1 송도해수욕장의 유래
4-2 중앙광장과 고래조형물
4-3 덕성관이야기
4-4 송도폭포
4-5 수박건지기 대형사고
4-6 백사장의 멸치 떼
4-7 송도바다축제
4-8 송도달집축제
4-9 우수의 바다, 송도(송도를 거쳐간 예술인)
4-10 회상의 바닷가(1969년 여름날의 송도풍경)
4-11 송도항과 제주해녀
4-12 거북섬의 전성시대
4-13 음악분수
4-14 송림공원




4-1 송도해수욕장의 유래

여러분, 이제 송도해수욕장의 설립과 주요 변천과정에 대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송도해수욕장은 1913년 일본인에 의해 개장되었습니다. 당시 부산거류일인들이 소나무가 우거져 솔섬 즉 송도라고 불리던 송림산에 수정이라는 휴게소를 짓고 송도유원지개발주식화사를 설립하여 해수욕장개발에 착수한 것이 이 아름다운 해수욕장의 출발점이랍니다.
 당시 송도바다는 일본인들이 처음 목도 했을 때 예부터 백사청송으로 불리던 바닷가와 동쪽의 거북섬과 송림공원의 절경과 서쪽의 오밀조밀한 해안선과 아스라한 볼레섬의 자태가 너무나 아름다워 저절로 탄성을 발하면서 동양의 나폴리로 부를 정도였답니다. 또 해운대나 광안리를 비롯한 다른 해안보다 수온이 가장 따뜻한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일제시대 내내 부산의 대표적 해수욕장겸 유원지로 군림하던 중 해방후의 귀환동포와 6.25의 피난민으로 부산인구가 폭발하자 1964년 지금의 송도폭포 뒤 암벽과 거북섬 사이에 길이420m의 케이블카가 설치되고 송림공원과 거북섬사이에는 구름다리가, 또 1사장앞 해상에는 다이빙대가 설치되어 여름 내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가 되어 <봄가을 동래온천, 여름 한철 송도다>라는 대중가요가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부산의 젊은이들이 포장유선을 타고 데이트를 즐기던 송도해수욕장은 휴전 후 피난민이 돌아가고 주변에 넓고 교통이 좋은 대형해수욕장이 생겨나면서 점점 방문객이 줄어 추억의 해수욕장으로 변해갔으며 80년대의 급속한 인구팽창으로 수질이 악화되면서 차츰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91년 발행 서구지를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숙박업소 97개소, 횟집 110개소, 유선 16척, 보트90척이나 있었는데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보트마저 이제 구경할 수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추억의 해수욕장이라는 이름만 남아 쇠퇴일로를 걷던 송도해수욕장은 대망의 새천년 2000년대를 맞아 송도의 옛 명성을 회복하자는 구민의 뜨거운 열망을 모아 송도연안정비 5개년 계획을 수립, 해양수산부를 비롯한 무려 430억의 국시비를 확보하여

 해마다 태풍으로 쓸려나가 자길밭처럼 황폐해진 폭50m, 길이 670m를 경북 울진의 새 모래로 채우기로 하고 모래 유실을 방제하기 위한 물속의 제방인 잠제300m를 비롯, 연육제73m, 이안제140m를 설치하였습니다.
 또 해안도로확장과 함께 광장, 분수대, 목재데크, 스텐드, 램프등 수많은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아름다운 고래조형물까지 설치, 현재의 멋진 해수욕장을 가꾸었습니다.

 천혜의 경관에 넓은 백사장과 아름다운 조형물이 어우러진 이 해수욕장은 대보름달집축제, 현인가요제, 고등어축제등 낭만과 열정이 어루러진 향토사랑의 현장으로 이제 4년 연속 전국20대 해수욕장으로 선발되고 2010년의 해수욕객도 450만 명을 돌파 해운대와 광안리에 이어 부산의 3대해수욕장으로 군림하게 되었으니 과히 해수욕장의 부흥, 송도의 르네상스를 맞이했다고 아니 할 수 없겠지요. 아무튼 두루 잘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4-2 중앙광장과 고래조형물

여러분, 지금 우리가 선 자리가 송도해수욕장의 중심인 중앙광장입니다.
 지금엔 넓은 데크와 분수, 아름다운 고래조형물의 전망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지만 송도연안정비공사를 하기전인 1990년대까지만 해도 송도마을의 오수가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가에 자갈이 쌓이고 파래와 바다쓰레기들이 몰려오던 썩 아름답지 못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2,30m에도 못 미치던 백사장이 2005년 폭 70m로 대폭 넓어지자 중심지인 이곳에 중앙광장을 설치하여 각종행사와 축제를 열고 해수욕철에는 분수를 가동,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놀면서 모래도 씻는 가장 인기 있는 장소, 노른자위가 되었습니다.

또 매년 10월에는 이곳 중앙광장과 송도폭포를 포함한 백사장 일대에서 부산고등어축제가 펼쳐집니다. 2008년 창설한 고등어축제에 오시면 고등어회와 고등어찌개, 고등어구이와 간고등어요리등 모든 고등어 요리를 맛볼수 있으며 민속놀이와 풍물시장 등 다양한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제공됩니다. 기회 있으면 꼭 한번 오셔서 우리 서구의 대표생선이자 한국의 대표생선인 고등어를 시식하시고 오래오래 건강한 나날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앞바다를 보십시오. 거대한 귀신고래 한 마리가 머리와 꼬리만을 내어놓고 힘차게 자맥질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 뒤로 무지개를 타고 온 여섯 마리의 귀여운 돌고래들이 보이시죠. 또 잠제위에 설치한 작은 등대들도 보일 것입니다. 참으로 오밀조밀 아름다운 동화적인 풍경이 아닙니까?
 저 고래조형물들은 연안정비공사준공의 기념물로서 2007년 <무지개를 몰고온 귀신고래>라는 테마로 이상진 조각가를 통해 설치하게 된 것입니다.
 멀리 반구대암각화는 두고라도 요즘은 한국 포경업의 메카로 자처하는 울산 장생포를 비롯하여 수많은 고래조형물이 설치되는 추세입니다. 특히 가까운 수영의 민락교에도 범고래 세 마리가 설치되었지만 이렇게 주변경관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고래조형물은 아마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카메라를 가져오신 분은 카메라에, 그냥 옷신 분들은 기억의 창고에 가득히 채워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4-3 덕성관이야기

중앙광장 뒷편의 덕성관은 옛날 케이블카의 출발점이자 지금 인공폭포가 된 거대한 암벽을 끼고 남으로 먼 바다를 바라보는 송도해수욕자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덕성관의 창업자 구모씨(작고)는 송도해수욕장이 개장되자 중앙동에서 이곳에 새 건물을 지어 이주했는데 그 부인이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관광안내서에 광고를 내어 손님을 유치할 만큼 유명한 요정이자 숙박시설로 명성을 얻었답니다.
 이후 창업자의 아들도 일본인 아내를 맞아 부업을 계승했으며 손자 또한 제일동포 아내와 결혼, 3대의 일본인아내가 경영하는 숙박업소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답니다.
 거기다 반세기가 훌쩍 넘는 그 옛날에 <마루도꾸>라는 한문 큰 덕(德)자에 동그라미를 두른 마크를 창안, 간판에 새겨 건물정면에 세워놓았다는데 어쩌면 부산최고(最古)의 상표였는지도 모르지요. 그 유명한 상표가 꿋꿋이 송도바다를 지키다 2003년 매미호 때풍 때 사라졌다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덕성관은 비단 일본인뿐 아니라 우리 내국인에게도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으로서 이미 민간에 널리 알려진 소문이자 사실(史實)인 박정희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부산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재직중이던 젊은 장군 박정희는 자유당정권과 민주당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보면서 그 애국충정의 혈기를 감출 수 없어 동지를 규합, 이곳 덕성관의 창가에서 술잔을 나누면서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고 새 조국을 꿈꾸다 마침내 군사혁명과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반만년의 가난을 물리치고 부강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하는 초석을 놓았다고 합니다.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이 조그만 항구에서 민족사의 흐름을 바꾼 혁명의 불씨가 움텄다는 것은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겠지요.



4-4 송도폭포

옛 송도해수욕장의 구름다리, 케이블카, 다이빙대가 추억의 명물이라면 현대식으로 단장된 동화적인 분위기의 고래조형물과 바닥분수, 음악분수, 송도폭포등은 가히 신세대 명물들이라 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1,2사장한가운데 자리한 3단의 송도폭포는 낮에는 시원한 청량감으로, 밤에는 환상적인 조명으로 송도의 멋 중 단연 백미일 것입니다. 정면의 백사장은 물론 거북섬이나 해안산책로등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아름답고 야간조명이 밤바다에 아롱지면 더욱 황홀하여 가히 송도바다의 비너스 여신이라 할 것입니다.

 원래 이 송도폭포가 있던 자리는 검고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진 매우 가파른 절벽이었고 바위위에는 오랜 세월 해풍에 시달린 사철나무, 해국(海菊)등의 낮게 엎드린 해안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답니다.
 그러다 해수욕장이 조성되면서 그 우뚝한 지형을 활용, 오랫동안 케이블카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답니다.

 또 분수대너머 가로화단자리에는 누각형태의 작은 2층건물에 총각사장이 다과와 술을 파는 <총각집>이 있었는데 밀물 때는 바닷물이 건물의 축대를 적시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해서 아베크족의 명소가 되었었답니다.
 그리고 목포 맞은편 화단에 아담한 고등어조형물이 보이시죠? 뱌로 매년 10월 중앙광장과 송도폭포를 포함한 백사장일대에서 펼쳐지는 고등어축제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지요. 2008년 창설한 고등어축제에 오시면 고등어회와 고등어찌개, 고등어구이와 간고등어요리등 모든 고등어요리를 맛볼 수 있으며 민속놀이와 풍물시장등 다양한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제공됩니다. 기회 있으면 꼭 한번 오셔서 우리 서구의 대표생선이자 한국의 대표생선인 고등어를 시식해 보신다면 오래오래 건강한 나날을 보낼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인공폭포에서 굳이 옥에 티를 찾는다면 폭포물이 떨어지는 분수대부분의 바로 앞에 자동차가 줄을 잇는 해안도로가 있어 연인들이 사진을 찍거나 데이트를 즐기기에 접근성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획기적인 아이디어와 기술이 개발되어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트레비분수처럼 넓은 광장은 물론 동전을 던지는 애천, 바다관련 조형물과 파고라와 스텐드도 설치하고 커피와 캔맥주와 아이스크림도 팔고 연인과 스킨십에 열중하다 가끔은 소매치기도 당하는 자유로움과 번잡함이 무질서속의 질서로 공존하는 그런 명물폭포가 될 날이 온다면 더더욱 기막히게 더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4-5 수박건지기 대형사고

1960년대 송도해수욕장개장은 6.25피난민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부산시민에게 가장 가깝고도 친숙한 유원지였으며 특히 지금의 송도인공폭포에서 거북섬에 이르는 구름다리와 송림공원에서 거북섬간의 케이블카와 1사장앞의 다이빙대를 비롯하여 수많은 유선과 보트등 송도만의 독특하고 흥미로운 놀이시설들이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남녀를 비롯한 모든 시민들을 끌어 모으는 촉매가 되었답니다.
 또한 피난이나 학업을 위하여 부산에 머물다 서울이나 외지로 떠난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금도 늘 향수를 촉발하는 그리움의 바다가 되고 있답니다.

 1961년 여름 이 멋진 항구에서 <수박건지기사고>라는 대형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 경위는 이렇답니다.
 당시의 1사장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렸고 모 방송국주관의 노래자랑을 비롯하여 가장 피부가 희고 깨끗한 사람과 가장 새까맣게 탄 사람을 선발하는 <흰디, 껌디뽑기>등 여러 가지 이벤트를 벌어졌답니다. 그중에서 단연 하이라이트는 유선으로 바다에 풀어놓은 수박을 건져오는 <수박건지기>였답니다. 그야말로 젊은이들에겐 듣기만 하여도 입에 군침이 도는 흥미진진한 행사였을 테니까요.

 그해 <수박건지기>행사는 어쩐 셈인지 유선의 수박을 푸는 선장과 백사장의 진행자간에 신호가 맞지 않아 선장이 미처 수박을 다 풀기 전에 백사장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제가끔 <수박 빨리 건지기>와 <수박 많이 건지기>의 달콤한 꿈을 안고 풍덩풍덩 바다로 뛰어들었답니다.
 얼마 후 선발대가 제가끔 수박 한 덩이씩을 안고 반환점을 돌아오자 뒤쳐진 젊은이들은 <수박 빨리 건지기>는 이미 물 건너갔지만 <수박 많이 건지기>라도 입상하기위해 7,8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아직도 하역중인 유람선의 뱃전으로 맹렬히 오르기 시작했고 그 순간 쿵하고 배가 앞으로 뒤집히면서 뒤따라오던 후발대를 덥쳤답니다.

 실로 순식간에 일어난 이 사고로 중고등학생을 비롯한 아까운 젊은이 13명이 목숨을 잃고 수박건지기 행사는 영영 폐지되어 버렸답니다. 한갓 행사진행자의 사소한 실수하나가 아까운 목숨과 함께 스릴과 박진감이 넘치는 멋지고 달콤한 행사를 사라지게 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4-6 백사장의 멸치 떼

해마다 여름이면 5색의 파라솔이 펼쳐지고 인파로 북적대는 해수욕장 모래밭에 엄청난 양의 멸치 떼가 몰려와서 어부는 물론 인근의 주민들까지 물 반, 고기 반의 멸치 떼를 바가지로 몇 통씩 퍼 담아 쪄서 말려 일 년 내내 반찬으로 먹었다면 얼핏 납득이 되겠습니까?

 한 십여 년 전에는 송도바닷가에 멸치 떼가 나타나 멸치 떼를 쫒는 갈치 떼가 몰려오고 그 갈치를 쫒는 상어 떼가 쫒아온다는 재미있는 신문기사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만 한창 멸치를 잡던 시절에는 대여섯 척 또는 더 많은 어선들이 지금 묘박지가 된 저 남쪽바다에서 서서히 멸치 떼를 몰아오면 막바지에 몰린 멸치 떼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백사장에 튀어 올랐답니다.
 그 하얀 은빛비늘과 어선의 불빛은 얼마나 장관이며 바가지로 멸치를 퍼 담는 어부와 동네사람들의 함성은 얼마나 활기차고 신명이 났겠습니까. 물론 달이 밝은 밤에는 더 한층 환상적인 풍경이 연출되었겠지요.

  지금은 멸치 떼나 멸치잡이가 자주 벌어지지는 않고 어쩌다 아주 가끔 어부들이 멸치를 모는 경우가 있어 송도에 오래 살았던 원주민 몇 집에서 몇 동이 씩 멸치를 담아간다는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4-7 송도바다축제

새로운 밀레니엄 서기 2000년이 되면서 자치구 <서구>에서도 송도해수욕장을 널리 알려 옛 명성을 되살릴 <송도바다축제>를 개최하자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맨 처음 개최된 송도축제는 송도해수욕장의 명물 바나나보트젓기대회, 동별 씨름과 윷놀이, 초등학생 사생대회등 아주 기초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차츰 예산을 늘려 가설무대를 짓고 이벤트사의 전문사회자를 고용 화려한 노래자랑무대를 연출하기도 하고 <황토풀장 레슬링>등 다양한 오락프로를 도입하고 사물놀이, 각설이패,  엿장사등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또 1사장에선 업소별 생선회맛자랑과 시식코너를 개설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도 하고 야간에는 2사장모래밭에서 바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야회영화를 상영함으로서 제법 분위기를 갖추고 방문객수도 많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또 개막식 날에는 수많은 송도항의 어선이 저마다 <송도로 놀러오세요.> <송도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등의 문구를 한자씩 카드를 들고 꼬리를 물고 운항하며 오색의 연막탄을 터뜨리는 해상퍼레이드를 벌려 참석자의 경탄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산과 행사메리트가 많이 부족한 관계로 몇 번의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차별화된 축제를 연다며 바지선을 빌려 해상에 무대를 설치하고 백사장에서 무대로 통하는 나무다리를 놓았는데 축제시작을 30분쯤 앞두고 밀물로 모래와 함께 다리가 쓸려내려가 난리통이 벌어졌습니다. 현장에 있던 공무원과 송도주민들이 몽땅 동원되어 모래주머니를 쌓아 간신히 행사를 진행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진땀나는 일이었지요.

 또 2000년 바다축제의 노래자랑이 한창이던 밤9시경 갑자기 축제장의 마이크소리가 뚝 끊겨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 이유가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예산이 부족해 이벤트회사에 계약된 금액을 축제폐막직전인 노래자랑결승전직전까지 지급하지 못하자 이벤트사대표가 진행 중인 마이크를 몽땅 뽑아들고 줄행랑을 친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주최측에서는 구청직원을 몽땅 풀어 식당에 숨은 이벤트사대표를 찾아내어 통사정을 하고 마이크를 받아 노래자랑결승과 폐막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다사다난한 축제는 현인가요제가 창설되면서 폐지되었지만 송도의 주민이나 관게공무원들에게는 현인가요제만 열리면 문득 생각나는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정답고 그리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4-8 송도달집축제

송도해수욕장에서 벌어지는 행사중에서는 아마도 대보름 달집놀이가 가장 많이 알려졌을 것입니다. 그것은 송도달집태우기만이 부산은 물론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바다위에서 달집을 태우는 해상달집놀이로서 그 어느 해수욕장에도 밀리지 않는 가장 특색있는 행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2000년 개최된 제1회 송도해상달집축제는 당시의 송도해수욕장이 해마다 태풍에 모래가 유실되어 백사장이 해수욕장의 이름을 붙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좁을 때입니다. 인근상가에 불티가 옮겨 붙을까봐 바다위에 커다란 바지선을 띄우고 그 위에서 달집을 태우자는 궁여지책이 오히려 기가 막힌 축제를 탄생시키게 된 셈이지요.

 행사당일 해수욕장앞바다에는 커다란 바지선위에 높이 10미터가 넘는 대형 달집이 지어지고 백사장에는 방문객을 위한 소형별집도 2개나 지어졌습니다. 사전에 신문방송에 홍보가 되어 백사장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각자 소원을 소원이라는 쪽지에 적어 달집과 별집에 다는 소원빌기는 쪽지를 달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인기가 있습니다.
 파도가 드나드는 백사장 끝에는 장승을 전시하고 풍어제를 여는 한편 구청장, 국회의원, 구의장, 경찰서장을 비롯한 기관장과 송도번영회장을 비롯한 지역유지들이 축문을 읽고 절을 하고 점화를 하면 일반인들도 다투어 별집을 돌면서 소원을 빌었습니다.
 또 임해행정센터에서는 부녀회에서 산나물과 오곡밥에 막걸리를 푸짐하게 마련하여 관계자는 물론 노인들에게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발전을 거듭하며 송도해수욕장은 물론 서구의 대표적 행사가 되었지만 한 번은 불티가 민가 쪽으로 튀어 불이 날 뻔도 하고 바지선이 풍랑에 휩쓸려 승선자가 고립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연안정비공사로 백사장이 넓어진 이후로는 안전한 백사장에서 개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검푸른 밤바다에 한 송이 거대한 불꽃으로 붉게 타오르던 해상달집은 오래오래 시민들의 기억속에 남을 것입니다.




4-9 우수의 바다, 송도(서구를 거쳐간 예술인)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통영이 작곡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서양화가 전혁림을 비롯한 수많은 예술인을 길러내어 예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송도는 일제에 의해 개발된 단순한 유원지로 지내오다 한국동란으로 부산에 임시수도가 옮겨오면서 비로소 예술가가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송도에서 태어나서 자란 예술인을 찾아보면 현재 중앙에서 활동하는 서양화가 김명수화백, 작곡가로 조동산(본명 조부미)씨가 있습니다. 두 예술인과 송도초등학교 제 2회 동창인 송도 새마을금고 김수성이사장(66세)은 어린 시절 바닷가 언덕위에 집이 있던 두 사람은 아마도 등하교시 늘 아름다운 송도항과 볼레섬의 아스라한 모습을 보아 그렇게 훌륭한 예술가로 자랐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중에 특히 작곡가 조동산씨는 작사에도 능해 이태호의 <미스 고>, <몇 미터 앞에다 두고>, 송대관의 <차표 한 장>, <고향이 남쪽이랬지>, 박진석의 <천년을 빌려준다면>, 최진희의 <카페에 앉아> 남진의 <내 영혼의 히로인>, 남상규의 <세월의 강> 문희옥 <성은 김이요>등 수십 곡의 주옥같은 명곡을 작사,작곡한 우리 가요계의 대표적 작곡가중의 한 사람이랍니다.
 또 송도토박이 주용차씨가 <송도는 내 고향>이라는 대중가요를 작사, 작곡 김철수라는 분이 불렀으나 대중화되지는 못 했습니다.

 또 송도를 거처간 예술인은 멋진 베레모의 조병화시인이 있으며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 김봉남, 그러니까 얼마 전에 작고한 앙드레 김도 암남동사무소 뒤쪽에 살았다고 합니다. 
 비록 예술인은 아닐지라도 송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바로 구호병원을 세워서 수많은 피난민과 극빈자, 특히 고아들을 치료한 장기려박사입니다. 그 장기려박사는 한평생 피난지의 환자와 어린이를 돕다 간 인술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북에 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며 평생 재혼을 않은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보아 매우 드문 열혈남아입니다. 이 장기려박사에게 프랑스파리에 유학 간 우리나라 서양미술의 태두 김환기화백으로부터 비 오는 송도바다가 그립다는 우수에 젖은 엽서를 보내오기도 했답니다.
 근래에는 <사랑법>으로 유명한 시인 강은교교수도 송도해수욕장 뒤편 아파트에 거주하며 <벽속의 여자>연작등 여류시인 특유의 촉촉한 시들을 발표하다 지금은 이사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송도에 관련된 예술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만 송도의 우수, 정취는 비단 예술인뿐이 아니라 시민모두, 방문객 모두의 것입니다. 
 여러분도 느낌이 오는 데로 시도 쓰고 그림도 그려보십시오. 그리고 가장 접하기 쉬운 예술, 여러분의 디지털 카메라로 저 아름다운 바다와 섬들도 촬영해보시기 바랍니다.



4-10 회상의 바닷가(1969년 여름날의 송도풍경)


오전 10시, 새로 난 송도아랫길의 암남동사무소앞에 시내버스가 멎자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하던 승객들이 건널목을 건너 파출소옆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송도윗길이라고 불리는 아리랑고개를 넘어온 사람들도 지금 거북맨션과 태원모텔옆의 좁은 골목길로 몰려듭니다.
 동쪽사장으로 연결되는 이 좁은 골목길들이 당시에는 송도의 제일 번화가로 길가에는 술집, 식당, 여관, 세탁소, 미장원, 이발소와 구멍가게들이 즐비합니다. 머리위로는 거북섬을 향해 케이블카가 떠가고 출렁거리는 구름다리위에서 처녀들의 겁에 질린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송림공원을 향한 좁은 골목에는 미니골프장의 공치는 소리가 탁탁 들려옵니다.

 백사장은 벌써 만원입니다. 선장이 노를 저어주는 유선도, 연인이나 친구들이 직접 노를 젓는 보트도 덩실덩실 물에 떠있고 임해행정센터 맞은편에는 2,30명의 젊은이들이 다이빙순서를 기다리고 있고 그중 한명은 방금 힘차게 떠올랐습니다. 어린이들도 많습니다.
 서쪽사장에서 동쪽사장 끝까지 도로변 백사장에 말목에 광목을 씌운 50여개 천막에는 해수욕객들이 해수욕복을 빌려입고 입고 온 평상복을 보관시키고 나오는데 해수욕복을 빌리지 못해 구제품바지나 줄무늬 팬티들을 입은 사람도 여럿이 보이고  중년여성이나 할머니들은 속치마나 몸빼차림도 많습니다.
 임해행정센터 계단밑 좌우 2곳의 우물가에는 이미 해수욕을 마친 사람들이 두레박으로 물을 떠서 머리를 감거나 몸을 행구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줄도 꽤 깁니다.

 고동장사, 김밥아줌마, 아이스께끼장사가 백사장을 가로지르며 소리를 지르고 길가의 국수노점에서 구수한 멸치국물냄새가 퍼져 나오고 국화빵, 붕어빵도 굽기 무섭게 팔려나갑니다. 들고 온 수박을 먹는 사람도 많습니다.
 백사장에는 튜브를 빌려주는 사람과 검붉은 완장을 찬 사진사들도 손님을 부르느라 고함을 지릅니다. 한켠에서는 야바위꾼이 접시 속에 윷을 감추면서 손님을 부르고 저쪽에서 윷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방금 윷이 나왔는지 술취한 목소리가 왁자지껄합니다.
 사이다와 술을 파는 거북섬안 매점주인은 아나고라 불리는 붕장어회를 뜨느라 정신이 없고 방금 케이블카에서 내리는 손님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사진사들이 우루루 달려갑니다. 특히 송림공원에는 사진사가 많이 모여 커다란 사진기로 사진을 찍고는 미리 선금을 받은 손님들의 사진 보낼 주소를 받아 적고 있습니다.
 소나무 그늘에는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 관상, 수상에 얼굴에 점이나 사마귀를 빼는 사람들도 손님을 부르고 조롱안의 새가 종이에 인쇄된 점괘를 뽑아내는 새점도 보고 있습니다.

 어느새 마칠 시간이 되었는지 그만 물에서 나오라는 안전요원들의 호각소리가 백사장에 울려 퍼지고 파라솔이 걷힌 탈의실 앞에 사람들이 길게 서있습니다. 옷 맡길 돈이 없어 백사장에 옷을 묻은 아이들이 옷 묻은 장소를 잊어버려 팬티바람으로 안절부절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4-11 송도항과 제주해녀

지금 동쪽사장에서 거북섬으로 향하는 바다쪽에 보이는 ㄷ자형의 방파제로 둘러싸인 작은 항구가 유서 깊은 송도항 자리입니다.
 이 어항은 1913년 해수욕장이 개장되어 생선회의 수요가 늘어나자 가덕도를 비롯한 남해일대의 어부들이 조금씩 송도로 이주해 오면서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활어회를 해수욕장주변의 요정과 식당에 공급하는 기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아니고라 불리는 붕장어의 부산지역 활어도매기지역할을 하였으며 이어 제주도의 해녀들이 다수 뭍으로 진출, 이곳 송도에 정착하여 멍게, 해삼, 소라, 전복, 군소, 성게 등을 잡아 거북섬 앞 다리와 방파제에 펼쳐놓고 소주를 곁들여 팔면서 송도유원지의 또 하나의 먹을거리와 볼거리를 동시에 제공하던 곳이 되었답니다.

 재미있는 점은 송도의 어부나 해녀는 이곳 송도출신이 아니고 가덕도의 어부와 제주도의 해녀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객지에서 만난 가덕도 어부와 제주해녀가 결혼한 경우도 더러 있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부나 해녀도 점점 나이가 들어가도 자녀들이 고기잡이를 배우지 않아 해마다 숫자가 줄어 얼마가지 않으면 송도에서 어부나 해녀를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후 이 어항은 공동어시장이 생기면서 어로와 판매의 시스템의 바뀌고 남해고속도로가 뚫리면서 통영을 비롯한 남해안의 붕장어가 송도로 집하되지 않고 대도시로 직거래되면서  점점 기능이 쇠퇴되어가던 중 2000년 송도연안정비사업의 추진에 따라 2사장 끝의 현 어항 쪽으로 이전하여 어부와 해녀들이 생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집 남은 붕장어 도매상 이철조씨가 간신히 붕장어집산지 송도항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4-12 거북섬의 전성시대

여러분, 아주 오래전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를 보신분이 계십니까?
 막 산업화가 시작되던 시절 농촌에서 상경한 시내버스 여차장의 애환을 담은 내용입니다만 우리 송도에도 보릿고개시절 전국의 신혼부부들이 찾아오던 최고의 신혼여행지로서 또 지금은 사라진 케이블카와 구름다리가 그리워 머리가 희끗한 노신사들이 다시 찾아와 옛날을 회상하는 수많은 사연이 담긴 <거북섬의 전성시대>가 있었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작은 바위섬, 거북섬은 앞쪽은 낮고 등쪽이 볼록한 타원형섬으로서 맞은편의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송림산과 짝을 이룬 우리나라 곳곳에 산재한 전형적인 <솔섬유원지>가 된 것이지요. 이 작은 바위섬이 바로 송림공원과 송도해수욕장, 그러니까 송도유원지의 축, 즉 기준점역할을 하는 셈이지요.

 이 아담한 유원지는 1913년 부산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이  수정이라는 휴게소를 설치하여 음식을 팔기 시작한 것이 오늘 이 크고 화려한 송도해수욕장개발의 시초가 되었답니다.
 이후 송도가 부산의 대표적인 유원지로 발전한 1964년 이 섬에서 지금의 인공폭포 뒤 암벽까지 420m의 케이블카가 개설되고 송림공원에서 거북섬으로 건너가는 구름다리(줄다리)가 설치되었습니다. 생선회와 음료수를 판매하는 케이블카 건물에 딸린 매점과 가까운 바닷가에서 해녀들이 전복과 소라를 따서 파는 노점은 물론 썰물 때는 관광객이 직접 조개를 잡고 파래를 딸 수 있는데다 유선과 보트와 다이빙대의 낭만이 펼쳐지고, 멀리 볼레섬을 관망할 수 있는 이 섬에 신혼부부를 비롯한 관광객과 아베크족이 몰려 그야말로 거북섬의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 환상의 섬 거북섬도 인근의 해안개발로 모래유실이 계속되고 수질이 악화되기 시작하여 방문객이 줄어 마침내 케이블카운행이 중단되고 말았으며 송도연안개발사업으로 줄다리마저 철거되고 지금의 시멘콘크리트다리 거북교가 놓이고 남아있던 건물도 철거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거북섬 원래의 모습인 바위섬 자체로만 보존되며 가끔 낚시꾼이 찾는 한적한 바위섬이 되었으니 섬이나 사람이나 세상만사 반드시 부침이 무상한 것 같습니다.




4-13 음악분수

여러분, 어떻습니까. 송림공원을 배경으로 벽천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시원하시죠.

 그러나 낮에만 가동하는 이 벽천은 매일저녁 8시와 9시에 가동하는 음악분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저 앞 바다에 수많은 네온사인과 선박들의 불빛이 어리고 묘박지의 뱃고동이 낮게 울릴 때 폭죽처럼 솟구치는 분수를 배경으로 21분간에 걸쳐 7곡의 음악이 안개처럼 젖어오는 순간을 한번 상상해보세요. 아니 저녁시간에 한번 놀러와 보세요.
 게다가 해수욕철인 7,8월에는 저녁 8시 반과 9시 반에 한 번 더 도합 네 번이나 음악분수를 운영한답니다.

 이 아름다운 분수가 있는 자리는 당초에는 구름다리가 놓였던 자리로서 거북섬에 들어가는 입구지점이었지요.
 그러나 구름다리 철거 후엔 주변이 온통 횟집으로 채워져 송림공원이 음식점으로 포위된 형상이었는데 2009년에 4동의 건물을 철거하여 뒷면에 보이는 목재데크를 설치하고 음악분수대를 비롯하여 전망대와 청혼광장 등을 설치 송림공원의 면모를 일신한 것이지요.

 이따 전망대에 오르실 땐 데크벽면에 설치된 송도의 옛 모습사진을 유심히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평화롭던 자연부락의 모습과 싱싱한 송림, 다이빙대에 매달인 6,70년대의 추억어린 정경이 여러분의 눈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야간에도 분수가 가동될때(동절기 제외)꼭 한반 와 보시기 바랍니다.





4-14 송림공원

여러분 계단 옆의 벽면에 부착된 송도의 옛 모습 사진들을 잘 보셨지요? 케이블카와 구름다리가 놓인 거북섬도 아름답지만 소나무가 우거진 송림공원의 모습을 보면서 왜 이공원의 이름이 송림공원인지 이해가 되시겠지요. 그리고 저 아름드리나무들 좀 보세요. 사진에 나오는 바로 그 나무들인데 1913년 해수욕장개장 때 이미 노송이었으니 나이가 적어도 2,3백 살은 되겠지요.

 자, 여기는 송림공원전망대입니다. 가운데 소나무를 기준으로 오른 쪽으로는 해안산책로와 볼레섬을 볼 수 있고 왼쪽으로는 묘박지와 외항을 볼 수 있는데 둘 다 아주 절경이지요. 그리고 전망대에서 왼쪽으로 아담한 정자가 보이시죠. 송림공원의 정점에서 푸르고 푸른 남해바다를 내려다보는 명당자리에 지어진 송림정입니다.
 그리고 현판의 글씨는 우리 서구를 기반으로 총9선의 최다선의원에 문민정부를 연 거산 김영삼(巨山 金泳三)전대통령의 필체입니다.

 그리고 왼쪽을 보십시오. 꽃으로 장식된 벤치가 보이시죠?
 바로 청혼광장입니다.
 만약 여성 한 분이 저 밴치에 앉고 동행하신 남자분이 저 바닥에 꽃잎으로 장식된 하트를 밟으면 은은한 조명이 들어오면서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와 사방이 아늑하고 황홀해집니다. 고백하기 좋은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옛날 해변을 한 바퀴 돌아 붕장어회로 얼큰히 취해 이 송림공원을 찾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숲속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장래를 약속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더라는 소문을 살려 이곳에 현대식의 청혼광장을 만든 것입니다. 사랑의 진도가 잘 진척되지 않아 애태우는 분들은 이따 조용히 한번 활용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 아래쪽 소나무밑에 아담한 배가 한척 보이시죠. 실은 배 모양으로 지은 화장실입니다. 바닷가분위기와 잘 어울리지요. 여기가 오늘 탐방의 종점인 만큼 한번 들려서 비울 것은 다 비우고 가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송도해안볼레길탐방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많이 힘드셨죠? 그리고 즐겁고 재미있는 탐방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살고 싶은 행복도시 서구와 아름다운 송도는 언제나 여러분 환영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방문해주시기 바라며 늘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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