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숲길

태고의 숲길
2-1 암남공원
2-2 볼레섬
2-3 묘박지와 관제탑
2-4 해안초소
2-5 해안난대림
2-6 해안단층
2-7 포구나무쉼터
2-8 외톨이새 황조롱이
2-9 일곱점무당벌레를 찾아보세요(암남공원의 곤충)
2-10 새들의 땅, 두도
2-11 국제수산물류무역기지
2-12 서구의 대표새(직박구리와 맷비둘기)
2-13 옛사람들은 꽃이름을 어떻게 지었을까?
2-14 다람쥐와 청설모
2-15 우리는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조각의 세계)
2-16 반딧불이가 사는 마을
2-17 사라진 포구들(모지포와 백지포)




2-1 암남공원

 여러분, 우리는 지금 부산에서 가장 생태보존이 잘된 암남공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남해바다를 향해 우뚝하게 돌출한 55만여㎡의 이 암남공원은 청남색 바다와 적갈색 암벽 그리고 초록의 수풀이 어우러진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 비경은 일제시대에는 혈청소로 불리던 수의과학검역원이, 또 해방후로는 해안경비부대가 입구를 가로막아 반세기 이상 시민들의 출입이 통제된 금단의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해안난대림이 밀생한 깎아지른 암벽아래 몰래 잠입한 낚시꾼들이 어렵잖게 대물을 낚으면서 환상의 해안으로 소문이 퍼진 신비의 바닷가이기도 합니다.

 해방이후, 특히 지방자치제가 시행된 1990년대를 전후로 이 천혜의 절경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줄기찬 여론에 따라
 ▶ 1972년12월30일 건설부고시로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고 1982년부터 관계부처와 동물검역소 이전협의(지금의 수의과학검역원)를 시작하였으며
 ▶ 1996년4월5일 마침내 우선 제1차로 공원일부인 40만㎡을 개방키로 하고 각종 편의시설을 설치하여 개방하였으며
 ▶ 2000년 이후에도 비엔날레조각품14점을 설치하는 등 꾸      준한 노력 끝에 오늘의 아름다운 공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해안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무역선이 옹기종기 정박한 묘박지와 굴곡과 침강이 심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의 적갈색 단애와 용굴과 코굴로 불리는 해식동굴을 만날 것입니다. 또 푸른 솔숲과 해안난대림, 들꽃과 다람쥐와 나비는 물론 재갈매기와 민물가마우지등 많은 동식물의 식생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며 덤으로 14점의 비엔날레조각품도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이 경사가 심한 만큼 늘 안전에 유의하며 가도록 하겠습니다.



2-2 볼레섬

여러분 왼쪽 바다쪽을 한번 보십시오.
 조그마한 3각뿔 모양의 작은 섬과 그 남쪽으로 길고 널찍한 갯바위가 보일 것입니다. 저 섬이 바로 장군반도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아주 작은 섬 볼레섬입니다. 원래 동섬으로 불렸으나 송도해안볼레길을 끼고 있어 2010년 볼레섬으로 지명등록을 하였답니다.

 여러분, 섬은 보통 무인도와 유인도로 나누어지고 아주 작거나 낮아서 밀물이나 태풍때 파도에 묻히는 것은 여(嶼) 또는 갯바위라 부른답니다. 그러나 영토개념에 있어서는 헌법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에 나오듯이 모든 갯바위도 당당한 영토로 편입되지요. 따라서 저 볼레섬도 그냥 작은 갯바위에서 올해 비로소 볼레섬이라는 멋진 이름과 새 지번으로 지도상에 등재되게 된 것이지요.

 여러분, 저 작은 섬 볼레섬도 사실 많은 역할이 있습니다. 우선 송도해수욕장이나 거북섬쪽에서 보면 아스라이 돌아가는 해안선에 하나의 작은 동그라미로 마치 해안산책로의 마침표처럼 정답고 살가우면서도 왠지 안타까운 듯 묘한 정취를 불러오지요. 볼거리의 볼레섬, 볼품있는 볼레섬인 것입니다.
 또 2003년 태풍 매미가 덮치기 전만해도 섬꼭대기에 제법 큰 소나무 몇 그루가 있어 정말 멋졌는데 소금기로 고사되어 지금은 검은 잔재만 남았습니다. 앞으로 몇 십 년쯤 심한 태풍이 없어야 다시 옛날의 아름다운 소나무를 보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 남쪽의 갯바위를 보십시오. 능히 여남은 명이 앉거나 쉴 정도로 평평하지 않습니까. 저 바위가 바로 옛날 송도의 청년들이 용감하게 다이빙을 하던 자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바위가 상당히 높고 수심도 깊어 바로 뛰어내리면 위험하여 낭심을 두 손으로 꼭 감싸고 다리부터 뛰어내리는 소위 <배치기 다이빙>을 했다니 얼마나 우스꽝스럽기도 했겠습니까?

 깜찍한 여배우의 작은 애교점처럼 저 앙증맞은 볼레섬을 여러분들 오래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2-3 묘박지와 관제탑

여러분, 이번에는 고개를 들어 저 남쪽 바다를 한 번 보십시오. 눈앞에 크고 작은 배들이 많이 보일 것입니다. 저기가 바로 부산항에 드나드는 배들이 며칠씩 쉬어가는 배들의 주차장, 즉 묘박지(錨泊地)입니다. 전국에서 제일의의 묘박지인 것입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산꼭대기를 보십시오. 송신탑처럼 생긴 둥근 철탑하나가 보일 것입니다. 저 묘박지의 수많은 선박들을 통제하는 관제탑입니다. 사람들이 은하수를 <별들의 고향>이라고 부르듯 옹기종기 배들이 모여 자는 저 앞바다는 단순히 배들의 숙소를 넘어 <배들의 고향>일 것입니다. 거기다 부산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항구요, 선원회관, 어선원 회관등 선원복지시설이 두루 갖춰져 있으니 저 묘박지를 거친 모든 선원들이 꼭 한두 번씩은 들렀겠지요. 그렇다면 관제탑이 있는 이 언덕이 장승이나 솟대가 서있고 아침마다 여인네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무언가를 빌던 바로 그 고향마을의 성황당자리쯤 될지도 모르겠지요.

 여러분, 묘박지가 있는 저 남쪽 바다의 풍경은 매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답니다. 그것은 날마다, 순간마다 무역선과 어선은 물론 남해안의 항구나 섬으로 떠나는 쾌속선을 포함한 모든 연안여객선이 떠나거나 들어오기 때문이죠. 그 각각의 선박에 실은 화물처럼 각각의 목표와 꿈이 있고 선원들의 설렘이 있고 반가움과 아쉬움,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있겠지요.
 자, 여러분도 모두 이 푸르고 아득한 바닷가에서 모처럼 사춘기로 돌아간 듯 감상에 젖어 저 묘박지를 떠나는 배를 보면서 고향과 어머니와 또 다른 무엇인가 제각기의 그리움을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2-4 해안초소

여러분, 잠깐 걸음을 멈추고 발밑을 보십시오. 움푹 패인 웅덩이를 둘러싼 낮은 돌담과 오솔길의 흔적이 보이시죠? 군에 갔다 오신 분은 잘 아시겠지만 해안경비초소의 잠복호입니다.
 여러분, 이 암남공원에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해안난대림을 비롯한 희귀한 야생화, 새와 곤충등 그 식생이 잘 보존된 것은 오랫동안 혈청소라 불리는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이 입구를 차단한 덕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경비부대가 자리해 민간인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970년대 말인가 인근 다대포해수욕장에 무장간첩이 상륙하다 잡힌 일이 있고부터는 더욱 더 철통같이 지켰을 테니 동식물의 생태보호에야 금상첨화였겠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해안초소로 인해 초병들이 길을 내려 나무를 베고 식수를 찾느라고 숲을 휘저어 곤충이나 새를 놀라게 하고 군홧발에 묻어 낮선 외래식물의 씨앗이 유입되기도 하였겠지요. 또 배를 타고 암남공원을 돌다 보면 볼레섬 맞은편처럼 해안선이 돌출된 절경의 바위마다 생뚱맞은 초소들이 자리 잡고 있으니 득실이 반반이라 하겠지요.
 어쩌면 숲과 자연이란 단지 산과 바다같은 공간뿐 아니라 봄, 가을을 비롯한 긴 시간속에 펼쳐진 것일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분단의 산물인 해안초소가 자연을 보존하기도 하면서 조금은 훼손하기도 했겠지요. 그러면서 숲그늘, 바위그늘마다 초병의 젊은 숨결과 긴 외로움도 얽혔겠지요. 저 날선 바위에서 겨울바다를 응시하던 어느 선량한 초병의 외로움을 한번 떠올리며 자, 이제 해안난대림으로 옮기기로 합시다.



2-5 해안난대림

여러분, 이제 암남공원만이 가진 비경. 해안난대림을 관찰토록 하겠습니다.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해안난대림이라고 하니까 여러분들은 벌써 야자수나 바나나열매를 떠올리지 않을까하는 점입니다. 그냥 식물분류상 해안난대림일 뿐이지 따뜻한 남쪽바닷가 부산에서는 주변에서 흔히 보던 나무들일 수도 있습니다.

 용역보고에 의하면 이곳 암남공원에는 난대수종인 동백나무, 후박나무, 돈나무, 천선과나무등이 다소 분포되어있고 또 해안림인 사철나무, 보리밥나무등이 자라고 있답니다. 그러나 이 해안난대림은 대부분 저 앞쪽 경사가 심한 바위언덕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어 여러분이 하나하나 일일이 관찰하기는 상당히 위험합니다. 그러나 부산의 시화인 동백은 평소에도 많이 보던 꽃이고 또 일명 보리수로 불리는 보리밥나무는 낚시터로 내려가는 계단주변에 흔한, 이파리에 흰 빛이 도는 나무이니 자세히 한번 관찰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앞에 보이는 저 푸른 남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연근해에서는 점점 명태같은 한류성어류기 사라지고 참치같은 난류성어류가 많이 잡힌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되면 이곳에서도 동백나무, 후박나무, 보리밥나무등 활엽수로 이루어진 열대림이 점점 북상하고 소나무등 침엽수로 이루어진 온대림은 점점 더 북쪽으로 밀려나고 말겠지요. 이곳의 환경이 인간의 개입이 없이 자연생태의 변화 그대로 유지된다면 우리 후손중의 누군가는 저 바닷가언덕에서 망고나 바나나열매가 익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겠지요.




2-6 해안단층

여러분 잠깐 걸음을 멈추고 저 건너편 해안단층을 보십시오.   가까운 모지포주민들이 시루떡바위라고 부르는 적갈색 지층들이 마치 어느 할머니가 방금 쌀가루와 팥고물을 켜켜이 쌓아 시루떡을 안치 듯 길게 펼쳐져 아랫부분의 퇴적암과 윗부분의 화산암이 적갈색, 주황색, 회색등 현란한 지층을 형성하여 한 폭의 유화처럼 번져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크고 작은 바위섬과 암반에도 성난 파도가 하얀 물거품을 날리며 울부짖지 않습니까?

 이 암남공원의 이 지층은
 ▶ 약 1억년전 부산지역에서 호수바닥에 펄이나 자갈모래들이 쌓여서 퇴적암이 형성되고
 ▶ 약 7천 만 년 전 격렬한 화산활동으로 마그마의 관입이  일어난 후
 ▶ 약 3천 만 년 전 지각상승과 침식작용으로 산과 골짜기가 만들어지고 장군반도가 형성되면서 아래위로 퇴적암과 화산암의 놀랄 만큼 아름다운 지층이 형성되어 바다와 접하게 되었으며
 ▶ 현재까지 해안선이 계속 깎이면서 지층은 매일매일 더한층 아름답게 조각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만약 여러분이 배를 타고 저 해안선을 돌아본다면 정말 웅장하고 아름다운 해안지층의 파노라마와 해조류와 조개들이 다닥다닥 붙은 갯바위에서 옛날 공룡발자국을 연상케 움푹 파인 구덩이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오밀조밀한 리아스식 해안 특유의 해식동굴인 코끼리 코모양의 두 구멍의 <코굴>과 풍랑이 심할 때 어부와 해녀들이 대피한다는 <용굴>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절벽아랫부분은 매우 경사가 심하지만 낚시객의 안전을 위해 설치한 철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면 갈 수는 있습니다. 만약 꼭 절경을 보시려면 다음 기회에 등산화등 채비를 단단히 차리고 가보시기 바랍니다.
 그 정도의 노고를 감수한다면 적갈색 해안단애가 푸른 바다의 흰 파도와 눈부신 태양아래 펼쳐진 거대한 파노라마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환상의 파노라마는 갑자기 별천지에 온 것처럼 매우 황홀한 빛의 다발로 마치 환상속이나 초현실의 느낌을 주며 그 어지러운 느낌이 마치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의 배경처럼 몽환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무엇인가 울부짖고 싶은 그런 기분이 될 것입니다. 팍팍한 도시생활에 지쳐 무언가 울부짖고 외치고 싶은 분이 계신다면 다음 기회에 꼭 한번 접근해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2-7 포구나무쉼터

여러분, 이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쉼터에 오니 뭔가 편안하며 시원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여기가 암남공원에서 제일 넓은 골짜기로 유일하게 샘물이 있는 곳입니다. 옛날의 나무꾼이나 나물 캐는 처녀는 물론 최근의 초병들까지 유일하게 식수를 구할 수 있는  곳이지요. 그래서 목마른 산짐승과 새는 물론 나비와 잠자리등 많은 동물과 곤충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앉아 쉬는 벤치에 그늘을 제공해주는 저 커다란 포구나무를 잠깐 보십시오. 정확한 수령은 알 수 없지만 가끔 태풍이 부는 바닷가에서 저만큼 자랐다면 꽤나 오래된 고목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무그늘은 예로부터 이곳을 지나치던 나무꾼과 풍랑을 피하던 어부나 목마른 다람쥐, 소금기가 부족한 나비나 잠자리들이 제각각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재충전하던 곳이었겠지요. 또 가장 쉽게 나비와 잠자리와 다람쥐를 관찰할 수 있는 장소압니다. 오늘도 오래 인적이 끊어지다 모처럼 우리가 도착하게 된 것이겠지요.

 자, 여러분 시원한 샘물도 한잔씩 마시면서 태고의 숲과  바다를 보면서 잠깐의 휴식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2-8 외톨이새 황조롱이

이번에는 암남공원의 새들의 왕, 황조롱이를 알아볼까요?
 암남공원의 상공에는 불시에 한 번씩 사나운 육식조류이며  천연기념물 223호로 지정된 황조롱이가 출현한답니다.
 황갈색의 웅장하고도 날렵한 몸매에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가끔 영도의 태종대 등지에서 아주 가끔 날아와 목격하기가 매우 힘들답니다. 주로 새나 쥐를 잡아먹는 맹금류로 먹이사슬의 맨 위층에 자리한 이 황조롱이 한 마리를 먹여 살리려면 엄청 넓은 숲과 새와 쥐들이 있어야겠지만 아무튼 암남공원에는 둥지가 없답니다. 게다가 이 황조롱이는 매번 혼자서 날아오는 외톨이새랍니다.

문득 박재삼의 시조 <기러기>가 생각나는군요.

 하 많은 기러기 중에 서릿발 깃에 젖은,
 어미도 아비도 없는, 그 위에 누이도 없는
 그러한 기러기가 길을 내는 하늘을...

 제 아무리 새들의 제왕이라 하여도 그런 외톨이새라면 얼마나 서글프고 외롭겠습니까? 마치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비록 굳세고 고고해도 한없이 고독한 눈빛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암남공원의 외톨이황조롱이가 어서 빨리 짝을 찾아 나란히 날아가는 모습을 기대해보기로 합시다.




2-9 일곱점무당벌레를 찾아보세요(암남공원의 곤충)

여러분, 아 주변에는 이상하게 커다란 노송이나 참나무가 없고 낮은 관목림과 잡초들이 가득하지요? 바로 한 5년전에 산불이 난 자리입니다. 산불이 나서 불탄 나무들이 베어진 자리에는 이듬해에 고사리를 비롯한 양지에서 잘 자라는 식물과 여러 가지 야생화와 잡초들이 우거지게 되는데 그 기간에는 수많은 나비와 곤충들이 자리 잡아 일종의 야생화와 곤충의 학습원이 되는 셈이죠.

 97년 학술조사보고를 보면 암남공원에는 땅강아지, 고추잠자리, 왕귀뚜라미, 실베짱이, 여치, 방아개비, 땅메뚜기, 왕사마귀, 말매미, 호랑나비, 배추흰나비, 노랑나비, 푸른 부전나비, 솔나방등30종이 넘는 곤충이 서식하는 것으로 보고되어있고
 또 비교적 넓고 완만한 정상부분의 희망정일대에는 배추흰나비, 노랑나비, 고추잠자리등은 흔하게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또 간혹 반딧불이가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잠깐 이 곳에 서식하는 곤충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비교적 흔한 배추흰나비나 고추잠자리, 꿀벌들을 관찰하는 것도 좋지만 여치, 실베짱이, 방아게비가 날아가는 무지개 빛 날개를 볼 수있다면 상당한 행운이 되겠지요. 또 등에 일곱 개의 아름다운 갈색점이 찍힌 일곱 점 무당벌레를 발견한다면 실로 엄청난 요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 여러분 방아개비나 배추흰나비, 실베짱이나 고추잠자리 아니면 일곱 점 무당벌레의 행운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구경만 하시고 절대 손으로 잡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채집통보다는 기억속에 간직한 곤충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을 것입니다.


2-10 새들의 땅, 두도

여러분 바다건너 맞은편을 보시죠. 아름다운 등대가 있는 작은 섬이 보이시죠. 저 섬이 바로 두도입니다. 한자로 머리두자 頭島인데 모지포원주민들은 <대가리섬>이라는 투박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여러분, 지금의 지형이 이루어지기전의 이곳은 어떠한 형상이었을까요? 이 땅 역시 빙하, 화산, 지진, 해일로 지표면이 수많은 침강과 융기를 반복했겠지만 지금의 우리나라 동남해안에서 중국에 이르는 바닷가에 두루 공룡의 발자국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서남해안일대는 거대한 초원이나 호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그래서인지 이 암남공원일대도 장엄하고 변화무쌍한 해안단층과 암반이 분포되어 있고 갯바위에는 공룡발자국을 연상시키는 작은 웅덩이나 구멍들이 산재하며 특히 저 두도에는 학술조사결과 공룡알과 씨앗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눈앞의 저 섬에서 살아가던 거대한 초식공룡과 그 뒤를 쫓는 사나운 육식공룡이에 텐트처럼 커다란 날개를 가진 익룡, 아니면 김수정의 만화에 나오는 아기공룡 둘리가 혀를 소옥 내밀면서 나타난다고 상상하면 얼마나 신기하겠습니까? 아직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의 섬 두도를 보면서 자유로운 상상의 날개를 한 번 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전방에 바라보이는 섬 동쪽기슭의 빾빽한 나무들이 바로 동백군락지입니다. 또 종유석이 매달린 동굴과 두 개의 지층이 교차하는 지질학의 현장도 있답니다. 낚시꾼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바위가 무너지고 길이 막혀 섬을 돌아다니기가 많이 불편하다는데 지금도 섬 일부가 조금씩 무너진다는데 원시의 섬에서 풍화작용으로 바위가 무너지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지구의 숨소리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한자의 섬도(島)자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아시는가요? 바로 뫼산(山)자위에 새조(鳥)자를 얹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TV에서 본 독도처럼 인적 없는 섬들이야말로 수많은 바닷새들이 자유롭게 비상하며 짝을 짓고 알을 품는 가장 안전한 서식지가 아니겠습니까?.
 저 두도만이라도 본래의 주인인 재갈매기와 괭이갈매기가 새끼를 치고 민물가마우지와 해오라기가 철마다 찾아오는 원시의 섬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21세기 원시의 섬으로 말입니다.



2-11 국제수산물류무역기지

여러분, 왼쪽을 보십시오. 나뭇가지 사이로 커다란 건물들이 보이시죠. 저기가 바로 감천신항만에 조성된 국제수산물류무역기지이며 저 커다란 건물들은 수산물가공공장과 냉동창고들입니다. 또 바로 우리발 아래도 시퍼런 바닷물과 나란히 서있는 긴 건물이 보이시죠? 저곳은 연근해와 원양에서 잡은 모든 물고기를 집산하여 하역, 입찰, 판매, 포장, 수송이 원스톱시스템으로 처리하고 있는 공영수산물도매시장입니다. 한마디로 전국최대의 수산물기지입니다.

 이 단지가 소재한 우리서구에는 고등어와 오징어를 비롯한 연근해어업의 수산물을 2/3이상 위판하는 공동어시장까지 남부민동에 소재함으로서 횟감인 활어에서부터 구이와 찌개, 제수용품을 비롯하여 찬거리이든 간식용이든 건강보조용이든 어묵이든 그 용도와 형상, 가공형태를 불문하고 모든 수산물이 이 물류단지를 통해서 우리국민들의 식탁에 올려진다고 하겠습니다.

 이 국제수산물류무역기지는 동양 최대의 규모로 수산물류기능의 현대화를 추구하고 수산물수입 자유화에 대비하며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시설이며 총12만여㎡ 부지에 전용부두 500M, 12동의 관련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세계각국의 패총유적에서 예외 없이 어패류의 흔적이 발견되듯이 물고기야말로 우리 인류의 가장 오래고 친숙한 이웃이며 또 식생활의 많은 부분을 감당해온 꼭 필요한 자원이었습니다. 가히 한국수산물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이곳 부산서구에서 저 단지를 바라보는 오늘의 탐방이 앞으로 여러분의 식탁에 더 많은 생선이 오르게 하는 게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조개와 꽃게와 횟감과 생선과 어묵과 오징어든 모든 형태의 수산물을 접할 때마다 한국의 수산중심인 아름다운 고장 우리 서구를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2-12 서구의 대표새(직박구리와 맷비둘기)

암남공원에는 어떤 새들이 살고 있을까요? 또 얼마나 살고 있을까요?

 우선 바닷가이므로 재갈매기, 괭이갈매기 해오라기, 민물가마우지 등이 살고 울창한 숲에는 직박구리와 참새, 붉은 머리오목눈이, 꿩, 멧비둘기, 까치와 산까치인 어치 등이 살고 있으며 맹금류인 솔개와 천년기념물 제223호인 황조롱이까지 모두 텃새22종, 철새18종 총40종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1997년 용역조사결과임)

 그렇다면 어떤 새가 가장 많이 살고 있을까요. 암남공원 대표종은 붉은 머리 오목눈이이고 서구전체 대표종은 직박구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서구의 상징물인 비둘기는 주로 주택가에 살며 암남공원에는 그 4촌에 해당되는 맷비둘기가 살고 있답니다.

 여러분, 혹시 맷비둘기를 보신 분이 있습니까? 시골에서 자란분이라면 밭에 뿌린 콩씨와 새순을 사정없이 먹어치우는 그 얄미운 맷비둘기를 잘 아시겠지만 도시에서 자랐다면 비둘기라면 오로지 뚱뚱하게 살이 찐 도시비둘기만 보아서 물 찬 제비처럼 날렵한 맷비둘기를 잘 모르실 겁니다. 맷비둘기늘 침침하고 위험한 숲에서 조심조심 먹이를 찾아 헤매기 때문에 비둘기보다 덩치가 훨씬 작고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새중에서 그 육질이 가장 맛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손쉽게 맷비둘기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예, 아주 간단합니다. 맷비둘기는 체형이 날씬할 뿐 아니라 목덜미가 진초록 빛 깃털로 화려하게 장식한 집비둘기와 달리 몸 전체가 수수한 회갈색이 계통이며 특히 날아갈 때 꼬리깃에 아주 아름다운 갈색 줄이 선명히 드러난다는 점입니다.(비둘기는 없음) 말하자면 비둘기가 화려하게 치장한 도시풍 미인이라면 맷비둘기는 수수한 산골처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서구에서 가장 많이 산다는 직박구리는 어떤 새일까요? 우리들이 도시의 가로변이나 공원 또는 주택가 골목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비둘기보다는 작고 까치보다는 좀 덜 검은 회색빛이 도는 시꺼멓고 못 생긴 새가 바로 직박구리입니다. 나무열매는 물론 지렁이와 벌레와 곤충도 먹고 쓰레기장도 뒤지는 그 식욕이 왕성한 직박구리는 그 울음소리마저 찌이찌이 영 아름답지가 못 합니다.
 비록 멋은 없지만 식욕과 번식력이 제일 강한 직박구리가 사람들과 오래 동행해온 참새같은 작고 아름다운 새들을 도시에서 몰아내었다는 것은 언뜻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지만 무엇이든 생명체는 종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지구가족이라는 점에서 어쩔 수가 없는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2-13 옛사람들은 꽃이름을 어떻게 지었을까?

여러분, 잠깐 걸음을 멈추고 발아래를 한번 휘휘 둘러보십시오. 건성으로 보아도 10종류이상, 고개를 숙이고 찬찬히 본다면 아마도 수십 종 이상의 야생화와 나무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암남공원에는

 봄에 피는 개쑥갓, 민들레, 방가지똥, 개여뀌, 솜방망이, 엉겅퀴, 땅채송화, 큰개불알꽃 산딸기, 산개불주머니 등과

 여름에 피는 개망초, 등골나무, 쑥부쟁이, 닭의장풀,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 물봉선, 술패랭이 외에

 백여 종이 넘는 야생화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길가나 잔디밭에서 흔히 밟히는 평범한 잡초들도 자세히 관찰하면 어느 것이나 일 년에 한번은 꽃을 피우고 씨를 맺는 그저 단순한 풀이 아닌 모두다 야생화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야생화이름을 살펴보면 개쑥갓, 개여뀌, 큰개불알꽃, 산개불주머니, 개망초 등 유난히 개짜(字)가 많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옛날 원시인들이 식물의 열매나 잎, 씨앗을 먹고살던 수렵채취시설에 먹어도 되는 식물과 먹으면 죽는 독초나 독버섯을 자식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모든 식물에게 이름을 지었는데 그중 그 모습이나 열매가 보기에 시원찮으면 떨어지면 개망초, 개여뀌, 돌미나리처럼 <개>자나 <돌>자를 붙이고 그럴듯하면 원앙이사촌등 <사촌>자를, 썩 괜찮다면 미나리아재비등 <아재비>자를 붙였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야생화중에는 큰 개불알꽃, 며느리배꼽, 며느리밑씻개등 어감이 좀 묘한 이름들이 있지요? 우선 저 단풍잎 같은 다섯 손가락을 가진 가시덩굴인 며느리배꼽과 타원형의 가시가 무성한 잎을 가진 저 며느리밑씻개는 옛날 농사짓고 살던 시절에는 고부갈등이 심하던 시절이라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미워하며 지은 이름이랍니다. 줄기와 잎에 가시가 억세어 만지기만 하면 손발이 긁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2-14 다람쥐와 청설모

암남공원의 저 빽빽한 풀숲이나 침침한 나무그늘에는 어떤 동물들이 살고 있을까요? 우리가 앞에서 일곱점무당벌레와 배추흰나비등 수많은 곤충이 암남공원에 사는 것을 알았다면 반드시 그 곤충을 잡아먹고 사는 천적관계의 짐승들이 있기 마련이겠지요.

 우선 전문적으로 땅속을 뒤져 지렁이와 애벌레들이 잡아먹는 두더쥐가 있고 잡식성의 땃쥐, 대륙밭쥐, 등줄쥐, 시궁쥐가 있으며 드물게 집박쥐도 산다고 합니다. 그리고 좀 큰 짐승으로는 노루의 일종이며 초식성인 고라니가 있고 여러 종류의 쥐와 다람쥐를 즐겨 잡는 족제비가 있고 마지막으로 아주 골치 아픈 존재, 사람들이 키우다 버린 집고양이들이 무법자처럼 숲속을 어슬렁거리기도 합니다.

 누구나 오솔길을 연상하면 언뜻 다람쥐가 떠오르듯 암남공원에도 많은 다람쥐가 살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의 동요에 다람쥐는 도토리 점심을 가지고 소풍을 간다고 하는데 사실 요즘 암남공원의 다람쥐는 느긋하게 소풍을 다닐 형편이 못 됩니다.
 그것은 자신보다 훨씬 크고 사나운 청설모가 숲을 점령, 밤, 도토리 개암, 솔방울속의 솔씨들을 닥치는 데로 먹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끼니가 다급한 다람쥐들은 도토리가 생긴다면 소풍을 가기보다는 겨울양식을 위해 청설모 몰래 땅속에 묻을 것입니다.
 그 후 다람쥐가 잊어버린 도토리가 싹이 터서 나중에 울창한 숲이 되어 다시 도토리를 열매 맺어 다람쥐를 먹여 살린다니 숲의 생태는 참 묘하기도 하지요.


2-15 우리는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조각의 세계)

여러분, 이제 비로소 조그마한 평지가 나오니 조금 숨통이 트이십니까? 이곳이 바로 암남공원에서 제일 넓은 공지 중앙광장입니다. 수도시설과 화장실, 벤치가 있으니 한 5분 휴식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여러분, 속담에 <노느니 염불>이라는 말이 있는데 편안한 자세로 저 앞의 조각품을 한 번 보십시오.
 저 커다란 조각품들은 암남공원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하던 2002년 해운대백사장에 전시되었던 부산국제비엔날레 전시 조각품들입니다. 상대적으로 문화시설이 적은 서부산에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부산시와 비엔날레관계자등에게 집요하게 섭외를 해서 어렵게 들여온 것입니다.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이니 가격도 엄청나답니다.

 여러분, 예술작품은 아는 만큼 보이고 또 보이는 만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좀 느껴지고 좀 알 것 같이 눈에 들어오십니까? 도저히 잡히는 것이 없다구요?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현대예술은 회화나 조각, 심지어 시에 이르기까지 많은 장르가 마치 너무 복잡하고 긴박해 마치 늘 일상에 쫒기고 허둥대던 도시인들이 갑자기 전류에 감전되듯 찌르르한 충격을 주는 듯 그런 패턴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보이지 않으면 느끼고 느낌이 없으면 그 뿐입니다.
그래도 그러한 작품을 한 번 대하고 나면 표현을 할 수 없지만 뭔가 느껴지는 듯도 하고 왠지 뿌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며 그런 전시장을 통과함으로서 괜히 문화적으로 뭔가 업그레이드된 듯 느낌도 받으니 아무튼 손해 볼 일을 아닙니다. 참 묘한 일이지요.

 자, 그러면 저 뒤쪽에 4각의 틀 안에 우산과 양복이 걸려있는 조각품을 보십시오. 아마 주제가 떠나감 또는 떠남의 준비로 설정된 모양인데 저 4각형의 가방테두리가 유선형의 비행기나 선박의 동선과 대비할 때 이번의 떠남이 결코 순탄하지는 못 할 것만 같은, 어쩌면 늘 떠나고 싶으면서 멈칫멈칫 주저앉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군요.
 매일 출퇴근을 하며 가족을 떠나거나 스쳐가는 봄과 가을과 나비와 잠자리처럼 또 문득 멀어지고 헤어지는 친구와 부모형제와 이웃처럼 우리는 자신이 떠나거나 무엇을 떠나보내는 일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으며 또 저 조각의 우산이나 가방처럼 얼마나 준비되어 있을까요?

 어느 날 문득 내가 한 장의 낙엽이 되어 어디론가 떠난다면,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못 한다면, 또 내게서 그렇게 떠나가는 고향이나 어머니, 그 옛날의 정인(情人)이나 황홀한 추억 같은, 그 누구나 그 무엇이 있다면 우리는 정말 마음속에 차분한 떠남의 준비가 되어있을까요. 그런 떠나감을 압축하는 한마디의 명료한 대사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2-16 반딧불이가 사는 마을

여러분, 학창시절, 특히 졸업식장 같은 데서 형설지공(螢雪之功)이란 말을 참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전기도 석유도 없던 옛날 가난한 선비들이 촛불을 켤 형편이 되지 않아 여름에는 반딧불로, 겨울엔 반사되는 눈(雪)빛으로 책을 읽어 학문을 이루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곳이  그 반딧불을 꽁무니에 매달고 날아다니는 반딧불이가 사는 숲입니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유익하고 많은 것을 시사하는 곤충이지요.

 그리고 박인희의 <개똥벌레>라는 노래도 잘 아시죠? “아무리 우겨 봐도 친구가 없어...오늘밤도 나 홀로 울다 잠이 드는” 그 외로운 개똥벌레가 저 점잖은 반딧불이라면 느낌이 이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어릴 적의 한여름에는 들판 가득한 벼 포기 위로 수많은 반딧불이 날았다 떨어지며 마치 은하수의 별무리가 쏟아지듯 장관을 이루었지요. 호기심에 한 마리를 잡아보면 조그맣고 못 생긴 개똥벌레의 꽁무니에서 싸늘한 느낌의 작은 불티가 금방 켜졌다 꺼졌다 했습니다. 농촌아이라면 대낮의 골목길의 개똥에서 흔히 보던 바로 개똥벌레였습니다. 그러니까 반딧불은 개똥벌레불이기도 한 셈인데 한여름 짝짓기철을 앞두고 수컷이 암컷에게 구애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 바로 반딧불인 것입니다.

 불과 십여 년전 만 해도 농약의 과도한 사용으로 우리나라 전역에서 반딧불이를 보기 힘들다는 이야기, 그 형설지공과 외톨이라는 두 얼굴의 곤충이 어쩌면 멸종될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습니다. 1급수에만 산다는 다슬기를 먹기 좋아하고 다슬기의 입속에 산란을 하여 번식한다는 반딧불이는 나날이 오염이 심해가는 절대적인 위기에 처한 것이죠.
 그러다 논과 도랑에서 밀려난 반딧불이가 깊은 산속의 작은 개울가나 바닷가숲속에서 간혹 발견되면서 반딧불이가 나타나는 곳은 오염이 되지 않은 청정지역으로 반딧불은 노천명의 시 <노루>처럼 청정지역에만 사는 고귀한 생명체로 인식된 것이죠.

 이곳 암남공원도 오랫동안 군사지역으로 묶여있던 덕으로 반딧불이가 살게 된 모양입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오늘 반딧불이가 사는 숲에 서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고 반딧불이가 사는 이 숲이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 이 청정한 땅 암남공원을 늘 기억하고 자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2-17 사라진 포구들(모지포와 백지포)

여러분, 잠시 고개를 들어 저 남족 산 아래를 보십시오. 국립수의과학검역원 뒤쪽으로 슬래이트집을 포함한 나지막한 건물들이 보이시죠? 바로 모지포마을입니다.

 1991년 발간된 <서구향토지>와 1994년 발간된 <서구민속지>에 의하면 엣날 괴정동에 목마장이 있어 거기서 길러낸 말을 장군산 서쪽 소로를 따라 몰고 와서 중앙에서 파견된 목자(牧子)에게 검사를 받아 배에 실어 중앙으로 보내었다고 하며 1850년까지 약 10세대의 어민이 사는 어촌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모지포에서 태어나서 모지포를 떠나본 일이 없다는 모지포 노인회장 김성기(67세)씨에 따르면 모지포마을은 1918년 일본인에 의해 혈청소가 들어서면서 혈청소의 관사와 혈청소직원들의 거주지로 생긴 마을로서 자기의 선대로부터 조선시대에 말을 검사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전연 들어본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주민 대부분이 혈청소에 다녔고 채소재비나 어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징집, 징용도 면제되고 김장거리와 안남미가 지급되는 혈청소취직을 최고의 희망으로 쳤으며 자신도 혈청소에서 정년퇴직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모지포는 보통의 농어촌 자연부락이 가지는 성황당이나 농악대도 없었으며 산신제나 풍어제를 지낸 일도 전연 없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마을자체가 국립수의과학검역원과 궤적을 같이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이는 아마도 옛날 말을 검사하던 시절과 혈청소설치사이에 상당기간 공백기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으며 앞으로 전문가에 의하여 조사, 고증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반가운 이야기는 한 십여 년 전 모지포경노당 맞은편(경노당에서도 보이는) 수의과학원의 파란색창고건물을 지을 당시 땅속 깊은 곳에서 누가 박은 것인지 알 수없는 말목(나무기둥)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수상도시 베니스는 물로 고대인들이 강가나 호숫가에서 살 때는 진흙바닥에 참나무기둥을 박고 기초를 닦은 사례로 보아 어쩌면 암남동패총에 대한 단서가 될지도 모르지만 이 또한 수의과학원이전후 전문가들이 밝혀낼 문제일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질문과 연구과제를 가진 마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약간 더 북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깎아지른 절벽이 보일 것입니다. 저곳은 매립전에 백지포라는 작은 포구가 있던 자리로 마을의 흔적은 저 위쪽 임도 옆에 등나무집이라는 작은 음식점하나가 있답니다.


아홉구비길

아홉구비길
3-1 국립수의과학검역원(구 혈청소)
3-2 빗살무늬 토기와 숫동(암남동 패총1)
3-2-1 일만 년 전의 가을날(암남동 패총 2)
3-3 동백꽃과 동박새
3-4 기다리는 마음
3-5 뉴질랜드 참전기념비
3-6 문바위골 <숭어들이>이야기
3-7 대마도를 보여드립니다.
3-8 장군산의 유래
3-9 송도의 야경


3-1 국립수의과학검역원(구 혈청소)

여러분, 송도에서 모지포로 넘어가는 이 고개의 왼쪽을 가로막은 긴 담장속에는 일제시대부터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된 비밀의 공간 혈청소가 들어서 해방 후 동물검역소로, 최근에는 국립수의과학검역원부산지원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십여 년 전 호주산 소를 수입하여 국내에서 한 달 이상 키워서 도살하면 국내산이라는 짝퉁 한우로 판매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지요? 그때 긴 소떼가 들어가던 곳이 바로 이 수의과학검역원입니다. 각종 동물의 생체와 가공품을 검역하여 전염병을 예방하고 유해동물의 반입을 방지하는 대단히 중요한 기관이죠. 1918년 창설된 이후 일제시대에는 주로 소와 말의 혈청에 대한 업무를 추진하여 흔히 혈청소로 불려왔습니다. 그래서 정원에는 검사용, 실험용으로 죽어간 수많은 소의 영혼을 위로하는 커다란 소위령비까지 있답니다.
 해방후인 1949년 부산가축검역소가 되었고 1979년 동물검역소 부산지소로 개칭되고 지금은 국립수의과학검역원부사지원으로 불리고 있지요.

 소재지인 서구에서 볼 때는 암남공원입구를 가로막기 때문에 한쪽 모서리가 철조망으로 차단되어 통행이 막힌 데다 모지포지역과 연계된 수산가공물류단지의 확충과 지역개발사업에 늘 장애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또 이 지역은 장군반도의 가장 잘록한 허리로서 옛 원시인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며 물고기와 조개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던 암남동패총자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됨에도 공식적인 학술조사를 결행, 일인들이 혈청소를 지음으로서 향토사와 고고학분야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한 점입니다.
 또 이 비밀스런 공간이 일제시대에는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만주의 731부대와 연계되었다는 민간의 소문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수의과학검역원의 이전은 지역사회의 해묵은 숙원이었지만 다행히 2010년 4월에 강서구에 이전키로 농림수산부장관과 부산광역시장간에 양해각서가 체결되었다니 참으로 반가운 소식입니다.
 이 검역원이 이전되면 측면이 차단되었던 암남공원도 사통팔달 편리하게 연결되고 국제수산물류무역단지의 관련기능도 확충될 것입니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미궁에 빠진 암남동패총을 발굴할 학술조사도 선행되어야겠지요. 아무튼 동물검역소의 이전은 정말 반갑고도 개운한 소식입니다.



3-2 빗살무늬 토기와 숫동(암남동 패총1)

여러분, 평소에 암남동 패총이란 말을 들어보았습니까? 아마도 오늘의 탐방에 나서기 전에는 대부분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암남동 패총은 구멍 뚫린 가리비 가면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도의 동삼동패총보다 약간 뒤진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동삼동 패총지역에 살던 집단의 식구가 점점 늘어나 그 구성원의 일부가 지금의 저 아래 지금 국립수의과학검역원자리인 모지포쪽으로 분가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공식적인 학술조사나 발굴이 없이, 또 동삼동패총의 그늘에 묻혀 거의 외부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셈이죠.
 그런데 일제시대에 일본인 도리이등이 이 패총을 발굴, 빗살무늬토기 몇 점과 전석(磚石)으로 불리는 숫돌1점, 마제돌도끼 2점, 조개팔찌 1점, 뼈로 만든 첨두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현제 그 정확한 지점과 연대초차 알 수 없으며
겨우 일본인 기요노가 소장했던 유물이 일본 천리대학 참고관에 보관되어 있고 그 초기의 탁본과 실측도가 우메하라 참고자료에 남아있어 이 유적의 성격을 짐작케 하고 있답니다.

 여러분, 왜 초기의 토기에는 빗살무늬들이 들어갔을까요? 그것은 최초에 토기를 구울 당시에는 흙반죽이 불에 굽히기 전에 뭉개지지 않도록 흙반죽으로 빚은 토기를 담아 불에 구웠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빗살모양의 무늬가 생겼기 때문이랍니다. 또 숫돌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숫돌이 지금의 정육점아저씨가 고기 자르는 칼을 쓱쓱 문질러 가는 그런 숫돌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먹에 쥐고 딱딱한 열매를 깨거나 나무를 자르는 돌칼이나 돌도끼를 가는 숫돌이니 숫돌역시 그냥 단단하고 펑퍼짐한 평범한 돌멩이였겠지요.
 그리고 돌도끼도 여러분이 어릴 때 본 박수동의 만화 고인돌의 주인공이 쓰는 자루 달린 도끼가 아닌 그냥 앞날이 좀 넙적한 길쭉한 돌로 보아야겠지요. 지금 여러분의 발밑에 채이는 평범한 돌멩이들이 바로 옛날의 돌도끼나 숫돌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3-2-1 일만 년 전의 가을날(암남동 패총 2)


고고학에서는 동삼동패총의 작은 집쯤으로 취급되는 암남동패총은 <한국의 고대어로>라는 패총전문의 책자를 보면 그 지층에서는 아주 드물게 동해안에서 잡히는 물과 뭍의 동물은 물론 남해안의 물고기와 조개붙이가 함께 발견된 매우 특이하고 중요한 패총이랍니다.
 사람들은 패총이라는 이름 때문에 패총을 조개의 무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패총은 조개무덤이 아니라 조개무지로 불리며 굴, 홍합, 소라등 조개류를 비롯하여 순록이나 곰, 심지어는 호랑이까지 고대동물의 뼈와 각종 씨앗과 꽃가루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있는, 주로 음식물 부산물이 퇴적된 일종의 쓰레기장입니다.

 당시의 음식물을 구하는 방법인 가장 기본적인 것이 수렵채취로, 그중 손쉽기가 움직이지 못하는 도토리나 버섯을 따고 새알을 줍는 방법이고 그 다음이 천천히 움직이는 조개류의 채취, 다음이 물고기나 작은 짐승을 잡는 일, 마지막이 잘못 하면 도로 목숨을 잃을 만큼 위험한 호랑이와 곰같은 맹수사냥이었겠지요.
 아까 말씀드린 데로 남해과 동해의 접점인 이 패총에는 위에 나오는 거의 모든 먹을거리의 흔적이 발견되는 데 출토량을 보면 가장 많은 순서가 물개의 일종인 강치가 주식이 되고 다음으로 순록, 굴을 비롯한 조개종류, 물고기, 곰등이 차례를 이었으며 도토리를 비롯한 식물의 씨앗들도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모두 먼 옛날 패총시대로 한번 돌아가 볼까요. 바야흐로 일 만 년 전의 어느 가을날 오후로 말입니다.
 영도섬이 마주 보이는 장군반도와 두도를 넘어서면 서쪽으로 트인 오목한 바닷가에 작은 움집하나가 있습니다. 움집안에는 수달피로 앞을 가린 어머니가 넓적한 돌 위에 마른 도토리를  펼쳐놓고 둥근 돌로 갈고 있습니다. 아홉 식구의 저녁거리입니다.
 머리가 헝클어져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다섯 아이가 발가벗은 채 바닥에 뒹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뒷산으로 순록을 잡으러 갔는지 물고기를 잡는 작살과 낚싯대는 움집바깥에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한참 후 아버지의 작살을 들고 나갔던 제일 큰 사내아이가 커다란 농어를 두 마리나 들고 자랑스럽게 나타납니다. 그 뒤쪽으로 처녀티가 완연한 큰 누나가 커다란 가리비와 대합조개를 순록가죽 치마폭에 가득히 담고 따라옵니다.

 해질 때쯤 아버지가 커다란 순록을 매고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돌칼로 순록의 가죽을 벗기는 아버지를 에워쌉니다. 모닥불을 피우고 통구이를 올려놓아 지글지글 고기가 익을 즈음, 휘익 바닷가에서 휘파람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다건너 동삼중리의 큰 아버지가 돌고래를 닮은 커다란 강치를 매고 찾아 온 것입니다. 사촌들도 다섯 명이나 왔습니다. 시끌벅적하게 저녁을 먹는 사이 환한 보름달이 떠올랐습니다.
  





3-3 동백꽃과 동박새

 여러분, 모짓개라고 불리던 여기, 모지포에서 송도해수욕장에 이르는 길을 암남공원로라고 합니다.
 혹시 이 길을 걸어보신 분이 계신다면 어느 지점에서나 사철 푸른 솔가지 사이로 솔잎보다 더 푸른 남항의 흰 파도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다 맑은 날이면 멀리 대마도가  보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옛날 송도해수욕장에서 모지포로 통하는 작은 오솔길이 1977년 국립수의과학원의 진입로로 확장되어 사용되다 1980년대 현재의 넓은 아스팔트길로 포장되자 낮에는 젊은이들의 아베크코스로 밤에는 부산 제1의 드라이브코스로 단숨에 알려지게 되었지요.

 이 암남공원로에는 김민부 시인과 손동인 시인의 시비 2기를 비롯하여 뉴질랜드참전기념비와 옛날 숭어잡이 망보던 바위가 있고 송도공원을 비롯한 전망 좋은 음식점이 즐비합니다. 그리고 건너 산기슭엔 동백나무가 길을 따라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동선과 탁 트인 전망을 가진 이 해안산책로의 가장 큰 명물은 아마도 이 도로를 따라 쭈욱 이어지는 한겨울에도 꽃피는 부산의 꽃 동백나무연도일 것입니다.

 다도해의 섬마다 붉디붉은 꽃을 피우는 동백꽃은 섬사람이나 어부 그리고 부산같은 따뜻한 남쪽 항구에 사는 모든 이에게 김소월 시인의 <영변약산 진달래>보다도 더 친숙한 가슴속의 꽃일 것입니다.
 1960년대 최대의 히트곡인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물론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에서도 꽃피는 동백섬으로 첫 구절에 등장하는 이 친숙한 꽃은 따뜻한 우리 부산시의 시화로 지정되어 <고결한 사랑, 겸손한 마음>이라는 꽃말처럼 인정 많은 우리 시민의 정서를 잘 나타내주기도 합니다.
 또 박목월의 시에서는 산다화라고 묘사되기도 한 이 우리나라 해안의 대표적인 꽃나무인 동백나무는 그 재질이 단단해 예로부터 얼레빗, 다식판, 장기쪽등 가구제조에 빼놓을 수 없는 재료였답니다.

  여러분 중에 동백꽃으로 특히 유명한 고창 선운사, <귀촉도>의 미당 서정주와 <태백산맥>의 조정래의 성장무대가 된 선운사 뒤 언덕의 그 붉디붉은 동백꽃을 본적이 있습니까?  정말 장관이지요. 그 선운사 동백숲에는 동백나무에만 깃들어 살며 동백꽃의 꿀과 작은 사과만한 동백나무열매를 먹고 사는 작고 귀여운 동박새가 있어 더 한층 운치가 있다지요..

 이곳 암남공원일대의 동백숲에도 1997년 학술조사에선 동박새가 서식한다고 보고되어 있지만 아직 동박새를 보았다는등의 동박새에 관한 예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숲의 규모가 동박새가 살기에는 좁은 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숲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싱싱함, 특히 저 푸른 바다의 전망은 선운사 동백숲에 무엇이 뒤지겠습니까? 어서 이 동백숲이 더 번지고 우거져 그 작고 아름다운 동박새를 어렵잖게 볼 수 있는 말이 오기를 다 같이 기대해보겠습니다.



3-4 기다리는 마음(김민부 시비)

여러분, 왼쪽의 커다란 시비를 보십시오. 부산의 대표적인 천재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민부 시인의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아담한 시비(詩碑)라기보다는 어쩐지 광개토대왕비처럼 거대하고 위풍당당한 기상이지요. 그것은 저 비수처럼 시퍼런 동쪽 바다에 넘어 말없음표처럼 옹기종기 도열한 오륙도(五六島)위에 기다리고 기다리다 해가 뜨기를, 그립고 그리운 달이 뜨기를, 마치 해와 달이 자신을 불러줄 단 한사람의 정인인 것처럼 애태우며 기다리는 거대한 그리움인지도 모릅니다. 또 그렇게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그리움을 담으려고 저렇게  우람한 자태로 선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요.

 아까 제가 김민부 시인을 천재시인으로 소개했는데 천재시인이란 일반적으로 시선으로 불리는 이백이나 영변약산의 진달래처럼 붉은 선혈로 죽어간 김소월처럼 시적 감성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경우를 말하지만 그런 시인이 요절함으로서 더한층 천재성과 신비감을 더한다고 할까요. 예를 들자면 김소월, 이상, 푸시킨, 라이나 마리아 릴케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김민부 시인 또한 아주 아까운 나이인 31세에 저 먼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김민부 시인은 여느 시인처럼 가난하거나 외로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부산 수정동 양과점집아들에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에 근무하는 능력있는 기자였으니 요즘으로 치면 엄친아내지 일등신랑감이라고 하겠지요.
 시인답게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한량이라 그가 사망한 1972년 10월 27일 새벽 3시경 그날도 얼근히 취해 다락방에서 촛불을 켜고 원고를 작성하다 불이 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튼 천재시인을 화마로 잃었다는 일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시인은 성남초등학교와 부산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부산은 물론 전국단위의 백일장이란 백일장은 모조리 제패할 정도였지만 장난이 너무 심해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을 정도로 개구쟁이이기도 했답니다. 부산문단을 대표하는 참으로 아까운 시인을 너무 일찍 잃었다고  70대 노시인들은 아직도 애석해하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두 연의 시는 다 읽어보았는지요? 천천히 한줄씩 읽어본다면 그 애절한 기다림과 그리움이 어느새 여러분의 가슴에 흥건히 고여 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저 시의 내용처럼 해를 기다리듯 달을 기다리는 그런 그리움이 있고, 그렇게 애달픈 사연과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까? 이 아름다운 풍광과 따스한 햇살에 젖은 이 순간 우리 모두 가슴 가득 그리움이 고인 시인이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3-5 뉴질랜드 참전기념비

여러분, 혹시 6.25때 우리나라에 군대를 파견한 혈맹이 된 참전16개국을 다 기억하는 분이 계십니까?
 또 그 16개국 중의 하나인 뉴질랜드가 먼 남반부에 위치한 줄은 잘 모르더라도 원주민인 마오리족의 전설에서 유래한 “비바람이 잠든 바다 잠잠해져오면...”으로 시작되는 <연가>라는 뉴질랜드의 민요는 한두 번 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바로 그 뉴질랜드군인이 처음 한국에 상륙한 지점이 송도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2001년 봄 주로 뉴질랜드 최대도시 오클랜드의 재향군인회의 한국전참전용사들이 참전기념비를 세우기로 하고 뉴질랜드영사와 서구청관계자들이 암남동 일대의 여러 지점을 답사하여 송도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 우뚝한 바위언덕에 뉴질랜드에서 실어온 거북이 모양의 거북바위라 불리는 기념석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서구청에서는 지리산에서 나는 좋은 기단석을 구해 오
고 진입로와 주변의 화단까지 말끔히 단장하여 기념식일정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기념식 당일 그만 포복절도할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당일 행사는 뉴질랜드참전용사는 물론 주한영사와 국방장관에다 부산시장과 서구청장이 참석하여 기념사를 하기로 식순이 짜였습니다. 이에 부산시의 국제협력담당사무관이 형장점검을 나와 직접 영어와 한국어 병기의 식순을 훑어보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기념석을 감싼 하얀 제막용 커버를 다시 맞추자는 것이었습니다. 기념석자체가 그리 크지 않아 양국의 내빈들이 끈을 잡고 제막을 하기엔 영 어울리지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기념석위에 제막커비를 덮을 높은 구조물을 세우고 커다란 제막커버와 끈을 달기로 하였습니다.
 시간이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는지라 급한 대로 커버의 길이만큼 붉은 나일론끈을 잘라서 국제시장포목점으로 직원을 출발시켰습니다.
 이어 버스로 뉴질랜드 재향군인들이 도착, 건장한 백인남자는 물론 뚱뚱한 마오리족 여성까지 송도항의 절경을 보고 원더풀을 연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새 커버는 오고 있는지 전화를 하니까 담당직원은 가고는 있는데 송도아랫길이 정체되어 꼼짝을 못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오토바이택배로 급히 보내라고 하는 사이 시장과 구청장, 그리고 뉴질랜드의 영사와 국방장관도 도착했습니다.
 우선 내빈들에게 주변경관을 안내하면서 교통경찰관에서 하얀 천을 실은 오토바이가 오면 빨리 안내하라고 시켰습니다.
 마침 시야에 오토바이 한대가 나타나 교통경찰이 순찰차로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택배기사는 교통단속을 하는 줄 알고 기념식장소를 지나 국립수의과학검역원쪽으로 쏜살처럼 내빼벼렸답니다. 휴대폰으로 연락해 동물검역소정문으로 되돌아온 기사에게 커버를 받아들고 3백 미터 가까운 오르막길을 직원3명이 릴레이 하듯 뛰었습니다. 그중의 2번 주자는 상당한 몸매의 여직원이었으니 참 볼만 한 풍경이었겠지요. 그렇게 행사는 잘 마졌습니다만 당시의 관계직원들은 지금도 생각만 하면 이마에서 진땀이 솟는다고 합니다.



3-6 문바위골 <숭어들이>이야기

여러분, 저 아래로 펼쳐진 V자형의 이 오목한 해역을 <문바위골>이라고 부르는데 몇 해 전까지 송도의 어부들이 <숭어들이>라고 부르는 숭어잡이를 하던 자리입니다.

 송도는 해수욕장개장이전에는 거의 민가가 없었고 개장이후  에도 해수욕장과 주변유원지를 찾는 방문객을 위한 서비스업만 발전하다 해방전후로 가덕도를 비롯한 남해의 어부들과 멀리 제주도의 해녀들이 유입되면서 비로소 체계화된 어업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가덕도출신 어부들이 가덕도 대항의 숭어들이를 문바위골에 들여오게 되었답니다. 그럼 지금부터 마지막 숭어들이의 어로장인 망수를 지낸 주중경선장(68)으로부터 구술된 숭어들이현장을 설명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옛날 숭어가 몰려오는 가을철이 되면 마을에서 가장 노련하고 눈이 밝은 어부가 저 왼손편의 시계탑이 있는 가장 높은 언덕에 원두막같이 생긴 망대를 짓고 그 위에서 숭어들이를 총지휘했다고 합니다. <숭어들이>란 지명이 아니고 육수자망이라는 여섯 척의 배가 통발처럼 생긴 그물망을 미리 바다에 깔아놓고 그 속으로 숭어떼가 몰려들 때 그물을 당겨서 잡는 어로기법을 말한답니다.
 그 여섯 척의 배는 망대의 바로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돌며 각각 안목선, 안잔등, 안귀잽이, 밭귀잽이, 밭잔등, 밭목선으로 불리는데 망대의 망수가 주로 영도다리 방향(아주 간혹 태종대방향)에서 숭어떼가 문바위골로 접근하면 “고기 온다!”라고 고함을 질러 선원들을 바짝 긴장시켰답니다. 그러다가 고기들이 미리 쳐둔 숭어들이로 완전히 들어오면 맨 앞쪽인 반목선과 안목선 중간에서 망대로 연결된 망줄을 벼락같이 당기어 입구를 봉쇄하고 숭어떼의 진행방향에 따라 “안목선 새기라! 받잔등 새기라!”라고 소리치면 각각의 배에 탄 어부들이 황급히 밧줄을 당겼답니다. 이렇게 한참동안이나 땀을 뻘뻘 흘리며 아주 재빠르게 밧줄을 당겨 마침내 거대한 숭어떼의 은빛 비늘이 그물에 가득하면 비로소 “어야디야, 어야디야” 흥겹게 소리치며 만선의 환호성을 질렀답니다..

 당시에는 어상자가 귀해 뱃전 가득히 쌓인 숭어들을 거북섬앞 어판장에 쌓으면 그게 몇 천 마린지 몇 만 마린지는 몰라도 커다란 두엄더미나 작은 집채만큼 쌓였다니까 듣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는 정말 푸짐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모처럼 숭어망대에 올라 저 푸른 문바위골에 여섯척의 선단을 거느린 어로장, 망수가 되어 우렁찬 목소리로 숭어들이를 지휘하는 호연지기를 한 번 펼쳐보시기 바랍니다.

 그 숭어들이가 오륙 년 전에 마지막 벌어진 후 지금은 어선도 감척되고 어부들도 나이가 들어 통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부분 70세에 가까운 어부들이 더 늙기 전에 언제 한번 숭어들이가 재현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3-7 대마도를 보여드립니다. 

 자, 여러분 저 건너 남쪽 바다를 보십시오. 남항 묘박지에 오순도순 떠 있는 무역선너머로 검은 띠 같은 것이 수평선에 가물가물 하는 것이 보입니까? 만약에 보셨다면 대단한 행운을 차지한 것입니다. 바로 대마도를 보신 것이니까요.

 여러분, 대마도는 비록 일본땅이지만 부산에서 휴대폰이 터질 정도로 가까운 곳입니다. 섬전체가 험준한 산으로 이루어져 늘 양식이 부족한 척박한 땅이죠. 그래서 흉년만 되면 왜구의 소굴이 되어 우리의 해안마을을 침탈한 것이 삼국사기에만 해도 수없이 등장하지요.
 또 임진왜란때는 대미도주 종의지란 자가 중 현소와 함께 침략의 염탐꾼과 앞잡이역할을 하였으니 우리에겐 가까운 이웃이면서도 친숙하거나 편안하기보다 눈위의 혹처럼 참으로 귀찮고 성가신 존재라 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대마도 관련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나무에 가려 훤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해수욕장 뒷편 천마산을 보십시오. 석성봉수대가 있는 정상에서 동쪽 영도섬을 향한 날카로운 바위봉우리하나가 보이시죠? 바로 천마바위입니다.
 아랫마을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천마산에는 풀밭이라는 뜻 의 초장(草場)동 마을이 있을 정도로 목초가 우거져 신라때부터 목마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목마장의 날렵한 천마가 저 천마바위에서 힘차게 발을 굴러 대마도로 건너갔다고 하며 그래서 천마바위에는 말발굽이 차고나간 움푹 파인 구덩이들이 여러 개 있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구덩이야 지각형성 때 생겼을 것이고 천마가 저 먼 곳까지 날아갈 수도 없겠지요. 그렇지만 재미있는 것은 저 천마산(天馬山)의 이름에 짝을 맞추듯 대마도는 그 천마산을 마주본다는 마주볼 대(對)자와 말마(馬)자의 대마도(對馬島)라는 점입니다. 참으로 묘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3-8 장군산의 유래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가 답사한 암남공원일대를 장군반도라 하고 왼쪽에 보이는 산을 장군산(將軍山)이라 부른답니다. 무슨 유래가 있을까요?

 민족최대의 국난인 1592년 임진왜란 때 일입니다. 삼천리강토가 송두리째 왜적에게 짓밟히고 오직 한산도의 이순신장군만이 왜적의 병참선인 남해를 차단하며 음력 7월 6일 그 유명한 한산대첩을 거두고 나서입니다. 전라경상연합수군이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부산, 김해, 명지, 낙동강등에 적선 500여척이 정박하여 연안을 약탈한다는 구원요청을 받고 지금의 영도앞바다와 다대포사이의 해역에서 왜선 수백 척을 격파한 <부산포대첩>때였습니다.
 당시 이순신장군의 수하에는 우부장 녹도(鹿島,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만호 정운(鄭運)장군이 좌부장 이억기 장군과 더불어 가장 충성스럽고 용맹한 장수였답니다. 그 날 선봉이 되어 맹활약을 펼치던 정운장군이 회군할 무렵 바로 저 앞바다에서 전사하였다하여 이 일대가 장군산과 장군반도라 불리었다고 전합니다만 정확한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답니다.

 여러분, 정운장군은 단순히 임진왜란때 전사한 수많은 장군중의 한 명이 아닙니다. 200년 이상 외침이 없이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던 시절이라 충무공 이순신, 동래부사 송상현과 흑의장군 정발, 다대포첨사 윤흥신같은 몇몇의 장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임지를 버리고 비겁하게 줄행랑을 놓는 판국에 충무공의 오른팔이 되어 그 많은 전투에 선봉장이 되어 치열하게 싸운 대단한 장수인 것입니다.
 그가 올린 대표적인 전과를 난중일기 1592년 7월 27일의 기록으로 살펴보면
 <아침 일찍 출발 영등(거제군 장목면)앞 바다에 이르니 적선이 율포에 있다고 한다. 복병선을 시켜 탐지케 했더니 적선이 우리가 먼저 온다는 것을 알고 남쪽 큰바다로 달아났다고 한다. 녹도만호 정운이 일시에 쫒아가서 적선 한 척을 온전히 사로잡아 왜적 머리 36개를 베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본관이 연일(延日)정씨인 장군은 나중에 병조참판 및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충장공이라는 시호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군산에서 전사한 정운장군의 사당은 왜 다대포에 있을까요? 전해 오는 말로는 장군이 다대포 앞바다를 지나다가 그곳 지명을 물어보다 몰운대(沒雲運)라는 말을 듣고는 죽다는 뜻의 <몰>자뒤에 오는 <운>자의 한글 운이 자기의 이름과 같아서 “아,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되겠구나.” 하고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다대포 몰운대에는 정운장군의 순의비와 사당이 있어 해마다 제향을 올린다고 합니다.(2010년은 제417회)

지금까지 우리가 그냥 푸르고 아름답게만 보아왔던 이 송도항이 바로 민족사의 현장이며 명장이 순국한 자리입니다. 아무리 외지거나 작은 땅이라 하여도 역사늘 피해가거나 피흘리지 않고 지켜낸 땅이 없다고 생각하니 새삼 옷깃을 여미게  하는군요.




3-9 송도의 야경

여러분, 이 곳은 송도일대에서 가장 야경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송도는 원래부터 백사장에서 보는 앞 바다, 볼레섬, 또 해안산책로나 암남공원로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송도만과 거북섬, 또 송림공원에서 바라보는 해안산책로일대, 거북섬에서 바라보는 백사장등 어디에서, 어느 뱡향을 바라보아도 모두 절경입니다.
 또 뜨거운 여름의 백사장도, 낙엽 지는 암남공원의 오솔길도, 아지랑이 아른대는 봄날의 바다도 좋지만 싸늘한 겨울바람에 점령당한 차디찬 겨울마저도 맑고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게다가 밤은 밤대로, 낮은 낮대로, 하늘이 맑으면 맑은 데로, 구름이 끼면 끼는 데로 일 년 365일 아름답지 않는 날이 없고 안개나 운무가 끼는 날의 회색 바닷가, 비 오는 날의 우수에 젖은 바닷가가 더욱 운치가 있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송도경치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높다란 언덕에서 바라보는 송도항구의 야경, 즉 백사장을 따라 길게 이어진 인근 상가의 붉고 푸른 네온사인이 물에 어려 꿈속처럼 출렁이는 모습입니다. 어둠속에 묻힌 부분은 배경과 상징이 되고 불빛에 어리는 부분은 영화나 꿈속처럼 아롱지기 때문입니다.
 그 절경의 백미보다 다 한층 기막힌 경치가 또 하나 있으니 바로 남해바다로 열린 묘박지의 야경입니다. 바람이 잔잔한 밤이면 오순도순 모여 앉은 배들이 꿈속에서 본 고향마을처럼 정겹다가도 풍랑이 심한 밤에는 배들이 모두 대피해버린 밤바다가 문득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적막속에 묻히기도 합니다. 게다다 오징어잡이철이 되면 수많은 어선의 집어등이 뿜어대는 휘황한 불빛이 마치 요술궁전처럼 황홀경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송도의 밤바다는 자세히 보면 2개의 V자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작은 V자는 현인광장을 기준으로 송림공원으로 이어지는 왼쪽과 새 어항입구로 이어지는 오른 쪽의 V자며
 두 번째 큰 V자는 멀리 자갈치를 기준으로 왼쪽의 V자와 송도로 이어지는 좌측의 V자가 빚어내는 환상적인 빛다발의 흔들림입니다. 여러분 다음에는 꼭 한번 야경도 구경해보시기 바랍니다.





추억속의 길

추억속의 길

4-1 송도해수욕장의 유래
4-2 중앙광장과 고래조형물
4-3 덕성관이야기
4-4 송도폭포
4-5 수박건지기 대형사고
4-6 백사장의 멸치 떼
4-7 송도바다축제
4-8 송도달집축제
4-9 우수의 바다, 송도(송도를 거쳐간 예술인)
4-10 회상의 바닷가(1969년 여름날의 송도풍경)
4-11 송도항과 제주해녀
4-12 거북섬의 전성시대
4-13 음악분수
4-14 송림공원




4-1 송도해수욕장의 유래

여러분, 이제 송도해수욕장의 설립과 주요 변천과정에 대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송도해수욕장은 1913년 일본인에 의해 개장되었습니다. 당시 부산거류일인들이 소나무가 우거져 솔섬 즉 송도라고 불리던 송림산에 수정이라는 휴게소를 짓고 송도유원지개발주식화사를 설립하여 해수욕장개발에 착수한 것이 이 아름다운 해수욕장의 출발점이랍니다.
 당시 송도바다는 일본인들이 처음 목도 했을 때 예부터 백사청송으로 불리던 바닷가와 동쪽의 거북섬과 송림공원의 절경과 서쪽의 오밀조밀한 해안선과 아스라한 볼레섬의 자태가 너무나 아름다워 저절로 탄성을 발하면서 동양의 나폴리로 부를 정도였답니다. 또 해운대나 광안리를 비롯한 다른 해안보다 수온이 가장 따뜻한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일제시대 내내 부산의 대표적 해수욕장겸 유원지로 군림하던 중 해방후의 귀환동포와 6.25의 피난민으로 부산인구가 폭발하자 1964년 지금의 송도폭포 뒤 암벽과 거북섬 사이에 길이420m의 케이블카가 설치되고 송림공원과 거북섬사이에는 구름다리가, 또 1사장앞 해상에는 다이빙대가 설치되어 여름 내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가 되어 <봄가을 동래온천, 여름 한철 송도다>라는 대중가요가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부산의 젊은이들이 포장유선을 타고 데이트를 즐기던 송도해수욕장은 휴전 후 피난민이 돌아가고 주변에 넓고 교통이 좋은 대형해수욕장이 생겨나면서 점점 방문객이 줄어 추억의 해수욕장으로 변해갔으며 80년대의 급속한 인구팽창으로 수질이 악화되면서 차츰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91년 발행 서구지를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숙박업소 97개소, 횟집 110개소, 유선 16척, 보트90척이나 있었는데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보트마저 이제 구경할 수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추억의 해수욕장이라는 이름만 남아 쇠퇴일로를 걷던 송도해수욕장은 대망의 새천년 2000년대를 맞아 송도의 옛 명성을 회복하자는 구민의 뜨거운 열망을 모아 송도연안정비 5개년 계획을 수립, 해양수산부를 비롯한 무려 430억의 국시비를 확보하여

 해마다 태풍으로 쓸려나가 자길밭처럼 황폐해진 폭50m, 길이 670m를 경북 울진의 새 모래로 채우기로 하고 모래 유실을 방제하기 위한 물속의 제방인 잠제300m를 비롯, 연육제73m, 이안제140m를 설치하였습니다.
 또 해안도로확장과 함께 광장, 분수대, 목재데크, 스텐드, 램프등 수많은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아름다운 고래조형물까지 설치, 현재의 멋진 해수욕장을 가꾸었습니다.

 천혜의 경관에 넓은 백사장과 아름다운 조형물이 어우러진 이 해수욕장은 대보름달집축제, 현인가요제, 고등어축제등 낭만과 열정이 어루러진 향토사랑의 현장으로 이제 4년 연속 전국20대 해수욕장으로 선발되고 2010년의 해수욕객도 450만 명을 돌파 해운대와 광안리에 이어 부산의 3대해수욕장으로 군림하게 되었으니 과히 해수욕장의 부흥, 송도의 르네상스를 맞이했다고 아니 할 수 없겠지요. 아무튼 두루 잘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4-2 중앙광장과 고래조형물

여러분, 지금 우리가 선 자리가 송도해수욕장의 중심인 중앙광장입니다.
 지금엔 넓은 데크와 분수, 아름다운 고래조형물의 전망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지만 송도연안정비공사를 하기전인 1990년대까지만 해도 송도마을의 오수가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가에 자갈이 쌓이고 파래와 바다쓰레기들이 몰려오던 썩 아름답지 못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2,30m에도 못 미치던 백사장이 2005년 폭 70m로 대폭 넓어지자 중심지인 이곳에 중앙광장을 설치하여 각종행사와 축제를 열고 해수욕철에는 분수를 가동,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놀면서 모래도 씻는 가장 인기 있는 장소, 노른자위가 되었습니다.

또 매년 10월에는 이곳 중앙광장과 송도폭포를 포함한 백사장 일대에서 부산고등어축제가 펼쳐집니다. 2008년 창설한 고등어축제에 오시면 고등어회와 고등어찌개, 고등어구이와 간고등어요리등 모든 고등어 요리를 맛볼수 있으며 민속놀이와 풍물시장 등 다양한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제공됩니다. 기회 있으면 꼭 한번 오셔서 우리 서구의 대표생선이자 한국의 대표생선인 고등어를 시식하시고 오래오래 건강한 나날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앞바다를 보십시오. 거대한 귀신고래 한 마리가 머리와 꼬리만을 내어놓고 힘차게 자맥질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 뒤로 무지개를 타고 온 여섯 마리의 귀여운 돌고래들이 보이시죠. 또 잠제위에 설치한 작은 등대들도 보일 것입니다. 참으로 오밀조밀 아름다운 동화적인 풍경이 아닙니까?
 저 고래조형물들은 연안정비공사준공의 기념물로서 2007년 <무지개를 몰고온 귀신고래>라는 테마로 이상진 조각가를 통해 설치하게 된 것입니다.
 멀리 반구대암각화는 두고라도 요즘은 한국 포경업의 메카로 자처하는 울산 장생포를 비롯하여 수많은 고래조형물이 설치되는 추세입니다. 특히 가까운 수영의 민락교에도 범고래 세 마리가 설치되었지만 이렇게 주변경관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고래조형물은 아마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카메라를 가져오신 분은 카메라에, 그냥 옷신 분들은 기억의 창고에 가득히 채워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4-3 덕성관이야기

중앙광장 뒷편의 덕성관은 옛날 케이블카의 출발점이자 지금 인공폭포가 된 거대한 암벽을 끼고 남으로 먼 바다를 바라보는 송도해수욕자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덕성관의 창업자 구모씨(작고)는 송도해수욕장이 개장되자 중앙동에서 이곳에 새 건물을 지어 이주했는데 그 부인이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관광안내서에 광고를 내어 손님을 유치할 만큼 유명한 요정이자 숙박시설로 명성을 얻었답니다.
 이후 창업자의 아들도 일본인 아내를 맞아 부업을 계승했으며 손자 또한 제일동포 아내와 결혼, 3대의 일본인아내가 경영하는 숙박업소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답니다.
 거기다 반세기가 훌쩍 넘는 그 옛날에 <마루도꾸>라는 한문 큰 덕(德)자에 동그라미를 두른 마크를 창안, 간판에 새겨 건물정면에 세워놓았다는데 어쩌면 부산최고(最古)의 상표였는지도 모르지요. 그 유명한 상표가 꿋꿋이 송도바다를 지키다 2003년 매미호 때풍 때 사라졌다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덕성관은 비단 일본인뿐 아니라 우리 내국인에게도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으로서 이미 민간에 널리 알려진 소문이자 사실(史實)인 박정희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부산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재직중이던 젊은 장군 박정희는 자유당정권과 민주당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보면서 그 애국충정의 혈기를 감출 수 없어 동지를 규합, 이곳 덕성관의 창가에서 술잔을 나누면서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고 새 조국을 꿈꾸다 마침내 군사혁명과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반만년의 가난을 물리치고 부강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하는 초석을 놓았다고 합니다.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이 조그만 항구에서 민족사의 흐름을 바꾼 혁명의 불씨가 움텄다는 것은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겠지요.



4-4 송도폭포

옛 송도해수욕장의 구름다리, 케이블카, 다이빙대가 추억의 명물이라면 현대식으로 단장된 동화적인 분위기의 고래조형물과 바닥분수, 음악분수, 송도폭포등은 가히 신세대 명물들이라 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1,2사장한가운데 자리한 3단의 송도폭포는 낮에는 시원한 청량감으로, 밤에는 환상적인 조명으로 송도의 멋 중 단연 백미일 것입니다. 정면의 백사장은 물론 거북섬이나 해안산책로등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아름답고 야간조명이 밤바다에 아롱지면 더욱 황홀하여 가히 송도바다의 비너스 여신이라 할 것입니다.

 원래 이 송도폭포가 있던 자리는 검고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진 매우 가파른 절벽이었고 바위위에는 오랜 세월 해풍에 시달린 사철나무, 해국(海菊)등의 낮게 엎드린 해안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답니다.
 그러다 해수욕장이 조성되면서 그 우뚝한 지형을 활용, 오랫동안 케이블카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답니다.

 또 분수대너머 가로화단자리에는 누각형태의 작은 2층건물에 총각사장이 다과와 술을 파는 <총각집>이 있었는데 밀물 때는 바닷물이 건물의 축대를 적시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해서 아베크족의 명소가 되었었답니다.
 그리고 목포 맞은편 화단에 아담한 고등어조형물이 보이시죠? 뱌로 매년 10월 중앙광장과 송도폭포를 포함한 백사장일대에서 펼쳐지는 고등어축제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지요. 2008년 창설한 고등어축제에 오시면 고등어회와 고등어찌개, 고등어구이와 간고등어요리등 모든 고등어요리를 맛볼 수 있으며 민속놀이와 풍물시장등 다양한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제공됩니다. 기회 있으면 꼭 한번 오셔서 우리 서구의 대표생선이자 한국의 대표생선인 고등어를 시식해 보신다면 오래오래 건강한 나날을 보낼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인공폭포에서 굳이 옥에 티를 찾는다면 폭포물이 떨어지는 분수대부분의 바로 앞에 자동차가 줄을 잇는 해안도로가 있어 연인들이 사진을 찍거나 데이트를 즐기기에 접근성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획기적인 아이디어와 기술이 개발되어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트레비분수처럼 넓은 광장은 물론 동전을 던지는 애천, 바다관련 조형물과 파고라와 스텐드도 설치하고 커피와 캔맥주와 아이스크림도 팔고 연인과 스킨십에 열중하다 가끔은 소매치기도 당하는 자유로움과 번잡함이 무질서속의 질서로 공존하는 그런 명물폭포가 될 날이 온다면 더더욱 기막히게 더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4-5 수박건지기 대형사고

1960년대 송도해수욕장개장은 6.25피난민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부산시민에게 가장 가깝고도 친숙한 유원지였으며 특히 지금의 송도인공폭포에서 거북섬에 이르는 구름다리와 송림공원에서 거북섬간의 케이블카와 1사장앞의 다이빙대를 비롯하여 수많은 유선과 보트등 송도만의 독특하고 흥미로운 놀이시설들이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남녀를 비롯한 모든 시민들을 끌어 모으는 촉매가 되었답니다.
 또한 피난이나 학업을 위하여 부산에 머물다 서울이나 외지로 떠난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금도 늘 향수를 촉발하는 그리움의 바다가 되고 있답니다.

 1961년 여름 이 멋진 항구에서 <수박건지기사고>라는 대형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 경위는 이렇답니다.
 당시의 1사장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렸고 모 방송국주관의 노래자랑을 비롯하여 가장 피부가 희고 깨끗한 사람과 가장 새까맣게 탄 사람을 선발하는 <흰디, 껌디뽑기>등 여러 가지 이벤트를 벌어졌답니다. 그중에서 단연 하이라이트는 유선으로 바다에 풀어놓은 수박을 건져오는 <수박건지기>였답니다. 그야말로 젊은이들에겐 듣기만 하여도 입에 군침이 도는 흥미진진한 행사였을 테니까요.

 그해 <수박건지기>행사는 어쩐 셈인지 유선의 수박을 푸는 선장과 백사장의 진행자간에 신호가 맞지 않아 선장이 미처 수박을 다 풀기 전에 백사장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제가끔 <수박 빨리 건지기>와 <수박 많이 건지기>의 달콤한 꿈을 안고 풍덩풍덩 바다로 뛰어들었답니다.
 얼마 후 선발대가 제가끔 수박 한 덩이씩을 안고 반환점을 돌아오자 뒤쳐진 젊은이들은 <수박 빨리 건지기>는 이미 물 건너갔지만 <수박 많이 건지기>라도 입상하기위해 7,8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아직도 하역중인 유람선의 뱃전으로 맹렬히 오르기 시작했고 그 순간 쿵하고 배가 앞으로 뒤집히면서 뒤따라오던 후발대를 덥쳤답니다.

 실로 순식간에 일어난 이 사고로 중고등학생을 비롯한 아까운 젊은이 13명이 목숨을 잃고 수박건지기 행사는 영영 폐지되어 버렸답니다. 한갓 행사진행자의 사소한 실수하나가 아까운 목숨과 함께 스릴과 박진감이 넘치는 멋지고 달콤한 행사를 사라지게 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4-6 백사장의 멸치 떼

해마다 여름이면 5색의 파라솔이 펼쳐지고 인파로 북적대는 해수욕장 모래밭에 엄청난 양의 멸치 떼가 몰려와서 어부는 물론 인근의 주민들까지 물 반, 고기 반의 멸치 떼를 바가지로 몇 통씩 퍼 담아 쪄서 말려 일 년 내내 반찬으로 먹었다면 얼핏 납득이 되겠습니까?

 한 십여 년 전에는 송도바닷가에 멸치 떼가 나타나 멸치 떼를 쫒는 갈치 떼가 몰려오고 그 갈치를 쫒는 상어 떼가 쫒아온다는 재미있는 신문기사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만 한창 멸치를 잡던 시절에는 대여섯 척 또는 더 많은 어선들이 지금 묘박지가 된 저 남쪽바다에서 서서히 멸치 떼를 몰아오면 막바지에 몰린 멸치 떼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백사장에 튀어 올랐답니다.
 그 하얀 은빛비늘과 어선의 불빛은 얼마나 장관이며 바가지로 멸치를 퍼 담는 어부와 동네사람들의 함성은 얼마나 활기차고 신명이 났겠습니까. 물론 달이 밝은 밤에는 더 한층 환상적인 풍경이 연출되었겠지요.

  지금은 멸치 떼나 멸치잡이가 자주 벌어지지는 않고 어쩌다 아주 가끔 어부들이 멸치를 모는 경우가 있어 송도에 오래 살았던 원주민 몇 집에서 몇 동이 씩 멸치를 담아간다는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4-7 송도바다축제

새로운 밀레니엄 서기 2000년이 되면서 자치구 <서구>에서도 송도해수욕장을 널리 알려 옛 명성을 되살릴 <송도바다축제>를 개최하자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맨 처음 개최된 송도축제는 송도해수욕장의 명물 바나나보트젓기대회, 동별 씨름과 윷놀이, 초등학생 사생대회등 아주 기초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차츰 예산을 늘려 가설무대를 짓고 이벤트사의 전문사회자를 고용 화려한 노래자랑무대를 연출하기도 하고 <황토풀장 레슬링>등 다양한 오락프로를 도입하고 사물놀이, 각설이패,  엿장사등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또 1사장에선 업소별 생선회맛자랑과 시식코너를 개설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도 하고 야간에는 2사장모래밭에서 바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야회영화를 상영함으로서 제법 분위기를 갖추고 방문객수도 많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또 개막식 날에는 수많은 송도항의 어선이 저마다 <송도로 놀러오세요.> <송도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등의 문구를 한자씩 카드를 들고 꼬리를 물고 운항하며 오색의 연막탄을 터뜨리는 해상퍼레이드를 벌려 참석자의 경탄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산과 행사메리트가 많이 부족한 관계로 몇 번의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차별화된 축제를 연다며 바지선을 빌려 해상에 무대를 설치하고 백사장에서 무대로 통하는 나무다리를 놓았는데 축제시작을 30분쯤 앞두고 밀물로 모래와 함께 다리가 쓸려내려가 난리통이 벌어졌습니다. 현장에 있던 공무원과 송도주민들이 몽땅 동원되어 모래주머니를 쌓아 간신히 행사를 진행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진땀나는 일이었지요.

 또 2000년 바다축제의 노래자랑이 한창이던 밤9시경 갑자기 축제장의 마이크소리가 뚝 끊겨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 이유가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예산이 부족해 이벤트회사에 계약된 금액을 축제폐막직전인 노래자랑결승전직전까지 지급하지 못하자 이벤트사대표가 진행 중인 마이크를 몽땅 뽑아들고 줄행랑을 친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주최측에서는 구청직원을 몽땅 풀어 식당에 숨은 이벤트사대표를 찾아내어 통사정을 하고 마이크를 받아 노래자랑결승과 폐막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다사다난한 축제는 현인가요제가 창설되면서 폐지되었지만 송도의 주민이나 관게공무원들에게는 현인가요제만 열리면 문득 생각나는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정답고 그리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4-8 송도달집축제

송도해수욕장에서 벌어지는 행사중에서는 아마도 대보름 달집놀이가 가장 많이 알려졌을 것입니다. 그것은 송도달집태우기만이 부산은 물론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바다위에서 달집을 태우는 해상달집놀이로서 그 어느 해수욕장에도 밀리지 않는 가장 특색있는 행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2000년 개최된 제1회 송도해상달집축제는 당시의 송도해수욕장이 해마다 태풍에 모래가 유실되어 백사장이 해수욕장의 이름을 붙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좁을 때입니다. 인근상가에 불티가 옮겨 붙을까봐 바다위에 커다란 바지선을 띄우고 그 위에서 달집을 태우자는 궁여지책이 오히려 기가 막힌 축제를 탄생시키게 된 셈이지요.

 행사당일 해수욕장앞바다에는 커다란 바지선위에 높이 10미터가 넘는 대형 달집이 지어지고 백사장에는 방문객을 위한 소형별집도 2개나 지어졌습니다. 사전에 신문방송에 홍보가 되어 백사장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각자 소원을 소원이라는 쪽지에 적어 달집과 별집에 다는 소원빌기는 쪽지를 달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인기가 있습니다.
 파도가 드나드는 백사장 끝에는 장승을 전시하고 풍어제를 여는 한편 구청장, 국회의원, 구의장, 경찰서장을 비롯한 기관장과 송도번영회장을 비롯한 지역유지들이 축문을 읽고 절을 하고 점화를 하면 일반인들도 다투어 별집을 돌면서 소원을 빌었습니다.
 또 임해행정센터에서는 부녀회에서 산나물과 오곡밥에 막걸리를 푸짐하게 마련하여 관계자는 물론 노인들에게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발전을 거듭하며 송도해수욕장은 물론 서구의 대표적 행사가 되었지만 한 번은 불티가 민가 쪽으로 튀어 불이 날 뻔도 하고 바지선이 풍랑에 휩쓸려 승선자가 고립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연안정비공사로 백사장이 넓어진 이후로는 안전한 백사장에서 개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검푸른 밤바다에 한 송이 거대한 불꽃으로 붉게 타오르던 해상달집은 오래오래 시민들의 기억속에 남을 것입니다.




4-9 우수의 바다, 송도(서구를 거쳐간 예술인)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통영이 작곡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서양화가 전혁림을 비롯한 수많은 예술인을 길러내어 예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송도는 일제에 의해 개발된 단순한 유원지로 지내오다 한국동란으로 부산에 임시수도가 옮겨오면서 비로소 예술가가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송도에서 태어나서 자란 예술인을 찾아보면 현재 중앙에서 활동하는 서양화가 김명수화백, 작곡가로 조동산(본명 조부미)씨가 있습니다. 두 예술인과 송도초등학교 제 2회 동창인 송도 새마을금고 김수성이사장(66세)은 어린 시절 바닷가 언덕위에 집이 있던 두 사람은 아마도 등하교시 늘 아름다운 송도항과 볼레섬의 아스라한 모습을 보아 그렇게 훌륭한 예술가로 자랐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중에 특히 작곡가 조동산씨는 작사에도 능해 이태호의 <미스 고>, <몇 미터 앞에다 두고>, 송대관의 <차표 한 장>, <고향이 남쪽이랬지>, 박진석의 <천년을 빌려준다면>, 최진희의 <카페에 앉아> 남진의 <내 영혼의 히로인>, 남상규의 <세월의 강> 문희옥 <성은 김이요>등 수십 곡의 주옥같은 명곡을 작사,작곡한 우리 가요계의 대표적 작곡가중의 한 사람이랍니다.
 또 송도토박이 주용차씨가 <송도는 내 고향>이라는 대중가요를 작사, 작곡 김철수라는 분이 불렀으나 대중화되지는 못 했습니다.

 또 송도를 거처간 예술인은 멋진 베레모의 조병화시인이 있으며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 김봉남, 그러니까 얼마 전에 작고한 앙드레 김도 암남동사무소 뒤쪽에 살았다고 합니다. 
 비록 예술인은 아닐지라도 송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바로 구호병원을 세워서 수많은 피난민과 극빈자, 특히 고아들을 치료한 장기려박사입니다. 그 장기려박사는 한평생 피난지의 환자와 어린이를 돕다 간 인술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북에 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며 평생 재혼을 않은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보아 매우 드문 열혈남아입니다. 이 장기려박사에게 프랑스파리에 유학 간 우리나라 서양미술의 태두 김환기화백으로부터 비 오는 송도바다가 그립다는 우수에 젖은 엽서를 보내오기도 했답니다.
 근래에는 <사랑법>으로 유명한 시인 강은교교수도 송도해수욕장 뒤편 아파트에 거주하며 <벽속의 여자>연작등 여류시인 특유의 촉촉한 시들을 발표하다 지금은 이사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송도에 관련된 예술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만 송도의 우수, 정취는 비단 예술인뿐이 아니라 시민모두, 방문객 모두의 것입니다. 
 여러분도 느낌이 오는 데로 시도 쓰고 그림도 그려보십시오. 그리고 가장 접하기 쉬운 예술, 여러분의 디지털 카메라로 저 아름다운 바다와 섬들도 촬영해보시기 바랍니다.



4-10 회상의 바닷가(1969년 여름날의 송도풍경)


오전 10시, 새로 난 송도아랫길의 암남동사무소앞에 시내버스가 멎자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하던 승객들이 건널목을 건너 파출소옆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송도윗길이라고 불리는 아리랑고개를 넘어온 사람들도 지금 거북맨션과 태원모텔옆의 좁은 골목길로 몰려듭니다.
 동쪽사장으로 연결되는 이 좁은 골목길들이 당시에는 송도의 제일 번화가로 길가에는 술집, 식당, 여관, 세탁소, 미장원, 이발소와 구멍가게들이 즐비합니다. 머리위로는 거북섬을 향해 케이블카가 떠가고 출렁거리는 구름다리위에서 처녀들의 겁에 질린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송림공원을 향한 좁은 골목에는 미니골프장의 공치는 소리가 탁탁 들려옵니다.

 백사장은 벌써 만원입니다. 선장이 노를 저어주는 유선도, 연인이나 친구들이 직접 노를 젓는 보트도 덩실덩실 물에 떠있고 임해행정센터 맞은편에는 2,30명의 젊은이들이 다이빙순서를 기다리고 있고 그중 한명은 방금 힘차게 떠올랐습니다. 어린이들도 많습니다.
 서쪽사장에서 동쪽사장 끝까지 도로변 백사장에 말목에 광목을 씌운 50여개 천막에는 해수욕객들이 해수욕복을 빌려입고 입고 온 평상복을 보관시키고 나오는데 해수욕복을 빌리지 못해 구제품바지나 줄무늬 팬티들을 입은 사람도 여럿이 보이고  중년여성이나 할머니들은 속치마나 몸빼차림도 많습니다.
 임해행정센터 계단밑 좌우 2곳의 우물가에는 이미 해수욕을 마친 사람들이 두레박으로 물을 떠서 머리를 감거나 몸을 행구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줄도 꽤 깁니다.

 고동장사, 김밥아줌마, 아이스께끼장사가 백사장을 가로지르며 소리를 지르고 길가의 국수노점에서 구수한 멸치국물냄새가 퍼져 나오고 국화빵, 붕어빵도 굽기 무섭게 팔려나갑니다. 들고 온 수박을 먹는 사람도 많습니다.
 백사장에는 튜브를 빌려주는 사람과 검붉은 완장을 찬 사진사들도 손님을 부르느라 고함을 지릅니다. 한켠에서는 야바위꾼이 접시 속에 윷을 감추면서 손님을 부르고 저쪽에서 윷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방금 윷이 나왔는지 술취한 목소리가 왁자지껄합니다.
 사이다와 술을 파는 거북섬안 매점주인은 아나고라 불리는 붕장어회를 뜨느라 정신이 없고 방금 케이블카에서 내리는 손님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사진사들이 우루루 달려갑니다. 특히 송림공원에는 사진사가 많이 모여 커다란 사진기로 사진을 찍고는 미리 선금을 받은 손님들의 사진 보낼 주소를 받아 적고 있습니다.
 소나무 그늘에는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 관상, 수상에 얼굴에 점이나 사마귀를 빼는 사람들도 손님을 부르고 조롱안의 새가 종이에 인쇄된 점괘를 뽑아내는 새점도 보고 있습니다.

 어느새 마칠 시간이 되었는지 그만 물에서 나오라는 안전요원들의 호각소리가 백사장에 울려 퍼지고 파라솔이 걷힌 탈의실 앞에 사람들이 길게 서있습니다. 옷 맡길 돈이 없어 백사장에 옷을 묻은 아이들이 옷 묻은 장소를 잊어버려 팬티바람으로 안절부절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4-11 송도항과 제주해녀

지금 동쪽사장에서 거북섬으로 향하는 바다쪽에 보이는 ㄷ자형의 방파제로 둘러싸인 작은 항구가 유서 깊은 송도항 자리입니다.
 이 어항은 1913년 해수욕장이 개장되어 생선회의 수요가 늘어나자 가덕도를 비롯한 남해일대의 어부들이 조금씩 송도로 이주해 오면서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활어회를 해수욕장주변의 요정과 식당에 공급하는 기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아니고라 불리는 붕장어의 부산지역 활어도매기지역할을 하였으며 이어 제주도의 해녀들이 다수 뭍으로 진출, 이곳 송도에 정착하여 멍게, 해삼, 소라, 전복, 군소, 성게 등을 잡아 거북섬 앞 다리와 방파제에 펼쳐놓고 소주를 곁들여 팔면서 송도유원지의 또 하나의 먹을거리와 볼거리를 동시에 제공하던 곳이 되었답니다.

 재미있는 점은 송도의 어부나 해녀는 이곳 송도출신이 아니고 가덕도의 어부와 제주도의 해녀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객지에서 만난 가덕도 어부와 제주해녀가 결혼한 경우도 더러 있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부나 해녀도 점점 나이가 들어가도 자녀들이 고기잡이를 배우지 않아 해마다 숫자가 줄어 얼마가지 않으면 송도에서 어부나 해녀를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후 이 어항은 공동어시장이 생기면서 어로와 판매의 시스템의 바뀌고 남해고속도로가 뚫리면서 통영을 비롯한 남해안의 붕장어가 송도로 집하되지 않고 대도시로 직거래되면서  점점 기능이 쇠퇴되어가던 중 2000년 송도연안정비사업의 추진에 따라 2사장 끝의 현 어항 쪽으로 이전하여 어부와 해녀들이 생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집 남은 붕장어 도매상 이철조씨가 간신히 붕장어집산지 송도항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4-12 거북섬의 전성시대

여러분, 아주 오래전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를 보신분이 계십니까?
 막 산업화가 시작되던 시절 농촌에서 상경한 시내버스 여차장의 애환을 담은 내용입니다만 우리 송도에도 보릿고개시절 전국의 신혼부부들이 찾아오던 최고의 신혼여행지로서 또 지금은 사라진 케이블카와 구름다리가 그리워 머리가 희끗한 노신사들이 다시 찾아와 옛날을 회상하는 수많은 사연이 담긴 <거북섬의 전성시대>가 있었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작은 바위섬, 거북섬은 앞쪽은 낮고 등쪽이 볼록한 타원형섬으로서 맞은편의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송림산과 짝을 이룬 우리나라 곳곳에 산재한 전형적인 <솔섬유원지>가 된 것이지요. 이 작은 바위섬이 바로 송림공원과 송도해수욕장, 그러니까 송도유원지의 축, 즉 기준점역할을 하는 셈이지요.

 이 아담한 유원지는 1913년 부산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이  수정이라는 휴게소를 설치하여 음식을 팔기 시작한 것이 오늘 이 크고 화려한 송도해수욕장개발의 시초가 되었답니다.
 이후 송도가 부산의 대표적인 유원지로 발전한 1964년 이 섬에서 지금의 인공폭포 뒤 암벽까지 420m의 케이블카가 개설되고 송림공원에서 거북섬으로 건너가는 구름다리(줄다리)가 설치되었습니다. 생선회와 음료수를 판매하는 케이블카 건물에 딸린 매점과 가까운 바닷가에서 해녀들이 전복과 소라를 따서 파는 노점은 물론 썰물 때는 관광객이 직접 조개를 잡고 파래를 딸 수 있는데다 유선과 보트와 다이빙대의 낭만이 펼쳐지고, 멀리 볼레섬을 관망할 수 있는 이 섬에 신혼부부를 비롯한 관광객과 아베크족이 몰려 그야말로 거북섬의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 환상의 섬 거북섬도 인근의 해안개발로 모래유실이 계속되고 수질이 악화되기 시작하여 방문객이 줄어 마침내 케이블카운행이 중단되고 말았으며 송도연안개발사업으로 줄다리마저 철거되고 지금의 시멘콘크리트다리 거북교가 놓이고 남아있던 건물도 철거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거북섬 원래의 모습인 바위섬 자체로만 보존되며 가끔 낚시꾼이 찾는 한적한 바위섬이 되었으니 섬이나 사람이나 세상만사 반드시 부침이 무상한 것 같습니다.




4-13 음악분수

여러분, 어떻습니까. 송림공원을 배경으로 벽천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시원하시죠.

 그러나 낮에만 가동하는 이 벽천은 매일저녁 8시와 9시에 가동하는 음악분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저 앞 바다에 수많은 네온사인과 선박들의 불빛이 어리고 묘박지의 뱃고동이 낮게 울릴 때 폭죽처럼 솟구치는 분수를 배경으로 21분간에 걸쳐 7곡의 음악이 안개처럼 젖어오는 순간을 한번 상상해보세요. 아니 저녁시간에 한번 놀러와 보세요.
 게다가 해수욕철인 7,8월에는 저녁 8시 반과 9시 반에 한 번 더 도합 네 번이나 음악분수를 운영한답니다.

 이 아름다운 분수가 있는 자리는 당초에는 구름다리가 놓였던 자리로서 거북섬에 들어가는 입구지점이었지요.
 그러나 구름다리 철거 후엔 주변이 온통 횟집으로 채워져 송림공원이 음식점으로 포위된 형상이었는데 2009년에 4동의 건물을 철거하여 뒷면에 보이는 목재데크를 설치하고 음악분수대를 비롯하여 전망대와 청혼광장 등을 설치 송림공원의 면모를 일신한 것이지요.

 이따 전망대에 오르실 땐 데크벽면에 설치된 송도의 옛 모습사진을 유심히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평화롭던 자연부락의 모습과 싱싱한 송림, 다이빙대에 매달인 6,70년대의 추억어린 정경이 여러분의 눈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야간에도 분수가 가동될때(동절기 제외)꼭 한반 와 보시기 바랍니다.





4-14 송림공원

여러분 계단 옆의 벽면에 부착된 송도의 옛 모습 사진들을 잘 보셨지요? 케이블카와 구름다리가 놓인 거북섬도 아름답지만 소나무가 우거진 송림공원의 모습을 보면서 왜 이공원의 이름이 송림공원인지 이해가 되시겠지요. 그리고 저 아름드리나무들 좀 보세요. 사진에 나오는 바로 그 나무들인데 1913년 해수욕장개장 때 이미 노송이었으니 나이가 적어도 2,3백 살은 되겠지요.

 자, 여기는 송림공원전망대입니다. 가운데 소나무를 기준으로 오른 쪽으로는 해안산책로와 볼레섬을 볼 수 있고 왼쪽으로는 묘박지와 외항을 볼 수 있는데 둘 다 아주 절경이지요. 그리고 전망대에서 왼쪽으로 아담한 정자가 보이시죠. 송림공원의 정점에서 푸르고 푸른 남해바다를 내려다보는 명당자리에 지어진 송림정입니다.
 그리고 현판의 글씨는 우리 서구를 기반으로 총9선의 최다선의원에 문민정부를 연 거산 김영삼(巨山 金泳三)전대통령의 필체입니다.

 그리고 왼쪽을 보십시오. 꽃으로 장식된 벤치가 보이시죠?
 바로 청혼광장입니다.
 만약 여성 한 분이 저 밴치에 앉고 동행하신 남자분이 저 바닥에 꽃잎으로 장식된 하트를 밟으면 은은한 조명이 들어오면서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와 사방이 아늑하고 황홀해집니다. 고백하기 좋은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옛날 해변을 한 바퀴 돌아 붕장어회로 얼큰히 취해 이 송림공원을 찾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숲속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장래를 약속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더라는 소문을 살려 이곳에 현대식의 청혼광장을 만든 것입니다. 사랑의 진도가 잘 진척되지 않아 애태우는 분들은 이따 조용히 한번 활용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 아래쪽 소나무밑에 아담한 배가 한척 보이시죠. 실은 배 모양으로 지은 화장실입니다. 바닷가분위기와 잘 어울리지요. 여기가 오늘 탐방의 종점인 만큼 한번 들려서 비울 것은 다 비우고 가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송도해안볼레길탐방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많이 힘드셨죠? 그리고 즐겁고 재미있는 탐방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살고 싶은 행복도시 서구와 아름다운 송도는 언제나 여러분 환영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방문해주시기 바라며 늘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